성령으로 충만할 때
사도행전 2:1-4
누가가 기록한 두 권의 책이 성경에 있습니다.
무엇 무엇 입니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입니다
그런데 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다른 복음서, 서신서 와는 달리 특별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동일하게
성령을 드러내고 성령을 나타낸다는 점입니다.
누가는 우리 주님의 탄생 기사에서
성령의 역활을 아주 중요하게 드러내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것도 성령으로 되었고
헤롯의 핍박을 피해 애굽으로 피하게 하신 것도 성령이고
주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것도 성령에 이끌리어 하신일이고
모든 공생애의 사역을 성령을 힘입어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마태복음에서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좋은 것을 주신다> 하셨는데
여기에서 하나님이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좋은 것을
누가는 특별히 <성령>(눅 11:13)으로 해석해주고 있습니다.
그런 누가가 사도행전에서는 성령충만을 통해
교회가 시작되고 교회가 성장하고 교회가 확장되었음을 강조합니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사람,
하나님의 바른 일군들의 공통된 특징은 성령충만입니다.
그리고 교회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성령충만임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님이 임하시는 과정을 기록을 하고 있는데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몇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첫 번째 교훈은 성령의 은혜를 누릴 수 있기 위해서는
함께 모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 다시한번 읽겠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여기보시면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하심과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곳에 임했습니까?
다 같이 함께 모인 곳에 임했습니다.
마18:20절에서 우리 주님은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여러분 성도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일 때 빠지지 마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그 모임 속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 모임에만 임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은혜가 임했습니까?
4절 말씀을 보시면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모였던 사람들은 모두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는데
만약 그 당시에 성령의 충만을 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어떤 사람입니까?
함께 모일 때 모이지 않은 사람입니다
도마는 제자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 함께 하지 못했다가
부활하신 주님의 방문을 받지 못했습니다(요20:24).
그러자 그가 어떤 말을 합니까?
다른 제자들이 다 주님 부활 하셨다고 하는데도
자신은 믿지 못하겠다는 말을 했습니다.
다 기쁨이 충만하고 다 믿음이 충만한데
혼자 다른 소리를 합니다.
불신앙의 소리, 부정적인 생각을 말했습니다.
도마가 왜 이런 말을 했습니까?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모일 때 함께 모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함께 은혜 받는 자리에 빠졌다가 은혜를 받지 못하면
자신의 영성도 잘 지켜가지 못할 뿐더러
공동체의 영성에 손해를 끼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교회가 함께 모일 때
성도들이 함께 모일 때 마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십시오.
교회가 어떤 프로그램을 진행 할 때는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대하는 마음으로 참여하십시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모두 받는 은혜를
나 혼자 놓치지 않도록 주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성령으로 충만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다시 보시면
성령의 충만함이 일어난 날을 <오순절>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왜 구약의 많은 절기 가운데
왜 하필이면 성령님이 오순절에 사람들에게 임하였겠습니까?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이 오순절은 이스라엘의 애굽에서의 구원을 기념하는
유월절이 지난 후 50일째 되는 날이며
첫 열매를 거두는 절기이므로 초실절(출34:23)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오순절의 구약적 의미는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이스라엘백성들이 약속의 땅에서의
첫 수확을 누리며 기뻐하는 데 있습니다.
구약의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의 억압에서 벗어난 것이고
영적으로는 죄악의 포로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면
주님이 유월절에 죽으시므로 우리를 죄에서 풀어내신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기간에 잡혀서 죽으시고 승천하신 후
성령을 오순절에 보내시므로
구원 받은 성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한 열매를 거두는 의미가 더하게 되었습니다.
다시말하면 유월절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얻음을 상징한다면
오순절은 예수 믿은 우리가 열매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신앙과 인격의 열매는 성령으로 충만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사랑 희락 화평 온유 절제 충성 자비..... 등의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신앙과 삶의 열매들이 맺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아무리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봉사를 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문제 중의 하나는
구원 얻는 유월절만 경험하고
열매 맺는 오순절을 경험한 교인들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하는
열매 없는 영적 어린아이들이 많습니다.
유모만 필요한 교회,
어린아이처럼 계속 돌봐주고 어르고 그래야
조용한 그런 공동체는 비극적인 공동체입니다.
그런 공동체는 봉사 좀 한다싶으면 이내 울고 싸우고 소리치고 사고가 납니다.
이것은 오순절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 같은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오순절을 경험하지 못하게 되면
권사가 되고 집사가 되어도
계속 어린 아이 같은 모습으로 기어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아름다운 인격의 열매
주님이 기뻐하시는 믿음과 삶의 열매를 맺어가는
성숙한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성령이 충만할 때 듣는 것, 보는 것, 말하는 것이 달라지게 됩니다.
먼저 성령으로 충만할 때 못 듣던 것이 들렸습니다
본문 2절 말씀을 보시면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라고 했습니다.
성령충만 할 때 신령한 귀가 열려 예전에 듣지 못하던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람의 귀로 듣지 못하는 소리를 영적 귀로 들을 수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 2,3장의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주시는
말씀의 마무리가 무엇입니까?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입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아무 소리나 듣지 않습니다.
들리는 소리를 듣지 않고 골라 듣습니다.
귀를 기울이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비판하고 험담하는 소리가 내 귀에 여전히 좋게 들린다면
나는 아직도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부정적인 이야기
험담하고
비난하고
비판하는 소리를 들게 되어지면
내 마음이 상하게 되어지고
내 영이 상하게 되어져 견딜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되면 듣는 것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밝고 좋은 소리를 열망하고
신령한 음성을 사모하는 사람
그래서 들어야 할 소리만 듣는 사람이 성령충만한 사람입니다.
또한 성령이 충만할 때 못 보던 것이 보였습니다
3절 말씀을 보시면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성령충만하면 보이는 것이 달라집니다.
성령충만한 스데반이 그랬습니다.
사도행전 7:55,56절에<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
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는 말씀이 기록되러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했던 스데반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하늘을 보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주님을 보았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충만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게 되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세상의 위협과 고통이 전혀 걱정스럽지 않았습니다.
거짓고소를 당하면서도 천사의 얼굴을 할 수 있었고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오히려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성령충만 하면 좋은 것만 보게 됩니다.
성령충만 하면 마땅히 보아야 할 것만 보게 됩니다.
성령충만 하면 하늘을 보고 하나님의 뜻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성령이 충만하자 말하는 것이 달라졌습니다
본문 4절 말씀을 보시면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충만하면 우리의 입이 달라집니다.
왜 여러분 우리의 말에 왜 문제가 있습니까?
왜 우리 속에 불평이 있고
불신앙적인 말이 나오고
남을 찌르는 말이 우리 속에서 나옵니까?
그것은 환경의 문제, 말재주의 문제이기 이전에 성령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우리의 언어와 관련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0장19절 말씀을 보시면
<말하는 이가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 이시니라>
사도행전 6장10절에서는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못하였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말이 성령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성령충만하게 되어지면 언어가 달라집니다.
성령충만하게 되면 감사하는 말 믿음의 말
남을 세우고 위로하는 말 이 나오게 됩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면 지혜로운 말을 하고
누구도 당할 자가 없습니다.
에베소서 4장에서 강조된 새사람은 언어의 변화를 강조합니다.
엡4:25절에<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는 말씀이 나옵니다.
성령으로 변화된 새사람은 참된 것 진실한 것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사람은 진실된 말로 그치지 않습니다.
엡4:29에는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했습니다
진실된 말 참된 말을 하는데 그치지 않고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말을 하며 사는 것이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성령충만하게 되면
이렇게 보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교회 다니는 대통령, 교회다니는 국회의원,
교회다니는 기업인, 교회다니는 교사와
직장인들 때문에 세상에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오직 성령충만한 사람에 의해 세상이 변합니다.
교회가 얼마나 많고 교인이 얼마나 많은가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은 아닙니다.
비록 그 수가 적어도 성령충만한 사람들이 있을 때
성령충만한 그들이 세상에 영향을 주고 세상을 변화시켜 갈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을 당시의 세계는
2억 5천만 명 정도 되는 인구였지만
120명의 소수가 성령충만을 받아 그 세계 그 세상을 바꿔 놓았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되어
나를 바꾸며
가정을 바꾸며
사회를 바꾸며
세상을 바꾸어 가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기에 힘쓰게 하여 주시옵시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신앙과 인격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하시며
성령으로 충만케 되어 보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이 되어
가정과 사회와 세상을 변화시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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