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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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책 내용)
1. 선악의 기준이신 하나님
2. 죄란 무엇이며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3.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십니까?
4.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입니다.
5. 구약의 성막은 복음의 그림자입니다.
6.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7. 복음의 길 '십자가의 도'
8. 생명의 성령의 법
9. 믿음의 순종, 은혜와 사랑의 행함으로
10.교회는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권능이 있습니다.
11.거듭남의 단회성과 계속성
12.복음의 순종한 사도행전 사람들
13.임마누엘, 작은예수로 사는 복음의 생활
들어가는말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세우신 계획 속에서 세상의 역사를 진행하시고 계십니다.
이것이 믿어지면 하나님의 계획은 나에게 섭리가 되며 예정하심이 됩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부터 사람을 만드시기로 계획하시고 사랑의 관계로 항상 같이 계심의 교제를 계획하셨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우주만물 모든 것을 다스리는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동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사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동물과 같은 존재로 추락한 사람을 신적존재(시82:6-7,요10:35), 신분회복의 임마누엘 사건입니다(마1:23).
성경은 사람이 천사 등 그 어떤 존재보다 존귀한, 창조주 다음 자리의 존재로 하나님 자녀라고 말합니다. 마땅히 자녀 된 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것을 단순히 은혜의 선물로 거저 받아 누리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위임된 권세로써 모든 만물을 다스리며 사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피조물에 종속되어 살아가거나 같은 수준에서는 사람의 존재가치를 제대로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냥 자녀의 다스리는 권능으로 담대하게 누리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道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으로 사람을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가장 존귀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사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이루시고 준비해 놓으셨습니다(요19:28-30).
십자가의 道란 로고스로서 세상의 모든 사람을 사랑하사 구원키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입니다. 십자가의 道란 거듭난 믿는 자들이 살아가야 할 영적인 길입니다. 십자가의 道란 이미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 이루어 놓으신 하나님의 섭리를 누리도록 만드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道를 교회에게 먼저 말씀하시어 실천하며 살라고 강권하십니다. 교회가 십자가 도의 삶을 살 때, 교회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도록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道가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살아있는 믿음은 교회 안에서 시작된 신앙의 행보가 가정과 이웃이라는 사회 속에서 진행되고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 밖으로 확장되어 실천되지 않고 있다면 어쩌면 구원 받지 못한 자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진리는 요란하지 않습니다. 혼란스럽지도 않습니다. 때문에 진리는 말씀을 실행하는 길인 십자가의 道로 안내합니다. 그런 가운데 성령으로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하며 순종하도록 이끌며 참 자유를 누리게 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 음성을 듣지 못하며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도 썩어져 가는 구습을 벗지 못하고 새로워진 나에 대해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여 세상의 교훈에 민감하며 마음의 그릇을 종교적 양식으로 복잡하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능력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은 오직 단순하게 예수님을 바라보며 성령을 따라 사는 삶 속에서 일어납니다. 십자가의 道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이루게 하는 영적원리이며 이치입니다. 십자가의 道란 거듭난 믿는 자들이 반드시 살아가야 할 영광의 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께서 거하시는 신부된 교회이며 하나님 자녀이며 이 세상을 향하여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때문에 육체가 된 사람으로만 살아가서는 안됩니다. 성령을 힘입어 세상을 초월하는 신적존재 같은 하나님 자녀와 교회로 살아가야 합니다. 성령을 따라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부여 받은 작은 예수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들은 성령의 가르치심을 통하여 하나님을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계획을 이 땅에서 이루어 가야 하는 임마누엘의 성전입니다. 거기엔 직분의 구별과 차별이 결코 없으며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특별한 권세가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통하여 그의 우주적 섭리를 현재에도 이루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영적전투에 대해 잘 알아야 합니다. 이런 사실을 가볍게 여기면 아직도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는 영적싸움에서 속기도 하고 또 알면서도 눈뜨고 패하기도 합니다.
능히 이길 수 있는 능력과 권세를 이미 주셨건만 능력을 더 달라고만 권세를 쓸 수 있게 해달라고만 기도합니다. 이런 불신만큼 하나님을 많이 아프게 하고 슬프게 하는 일이 없습니다. 무엇인가 더 준비해야만 할 수 있다는 마귀의 교묘한 거짓말에 더 이상 속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그 상태에서 회개하는 무릎과 단순한 믿음과 담대한 용기로 이 시대에 주신 예언의 말씀으로 삶의 다스림을 시작하면 됩니다. 그러면 성령의 불로써 귀신의 쫓겨남, 방언과 병고침, 레마의 말씀과 만물을 소성케 하심의 신적권능이 당신을 통해 너무나 쉽게 나타나며 또 만물을 번성시킬 수 있게 됩니다. 주신 말씀을 믿음으로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운행하심을 나타내 보이는 자가 이 시대의 진정한 예언자이며 선지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은 값을 지불할 수 없는, 공짜로 거저 얻을 수밖에 없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값을 지불하거나 요구되는 것은 더 이상 ‘은혜로 받는 선물’이 아닙니다. 다만 믿음으로 거저 얻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이든지 기복적 축사에 대한 대가를 요구합니다.
종교주의를 초월한 복음의 능력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 놓으신 모든 것들을 마땅히 값없이 거저 얻고 편안히 누리며 사랑의 은혜를 덧입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인본주의적이고 종교적이며 이기적인 욕망의 포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사랑과 자유와 감동적 감사가 아닌 억지로 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을 구걸하는 자로, 강포를 행하는 억압자로 만드는 것이 됩니다.
복음은 변화되거나 발전되지 않습니다. 사도들이 증거 하였던 복음이나 지금 우리들이 증거 하는 복음은 본질상 같아야 합니다. 때문에 복음은 시대나 민족을 초월하여 적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심오한 복음의 진수는 보는 영적인 눈의 크기에 따라 깊이와 넓이가 다르게 다가옵니다. 신앙은 습관화된 종교적 멍에가 아닙니다. 모든 무거운 짐을 벗겨주고 대신 짊어지는 한없는 하나님사랑입니다.
이 사랑 속에 거하는 자들은 영혼구령의 제사장적 사명의 삶을 위해서 수고와 헌신과 베품과 애씀의 대가를 기쁨으로 지불할 수 있습니다. 짐과 멍에가 되지 않고 오히려 자원함과 즐거움의 사명이 됩니다.
때문에 기독교의 갱신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신분과 사명을 바로 알아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참 자유를 얻어, 교회의 사명적 섬김의 삶을 실생활현장에서 시작하고 실천함으로써 이루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의 영성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道를 가르치고 실천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십자가의 道가 없으면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십자가의 道를 성령의 힘으로 삶 속에 펼쳐 나가는 살아 있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를 통하여 지금도 하나님은 그의 섭리와 계획을 진행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위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준비하셨으며 장차 다스리게 할 것입니다.
본 글은 계약신학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 구원의 확신, 십자가 대속사건과 성령의 강림 그리고 성령의 현재적 동행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참된 연합,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신부된 교회적 권세, 하나님 자녀로서 작은 예수의 삶을 설명하려고 한 글입니다.
먼저 이 글을 쓸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저의 목회사역에 적극적 후원자인 사랑하는 아내와 수연, 천수, 평강의 식구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미리 읽어주시고 수정해주신 가까운 친구 목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2000년 5월 5일 대전 석봉동에서
'십자가복음' 내용요약
복음의 실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복음이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예수의 죽으심과 장사, 부활하심으로 요약하였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복음으로 정의하고 있다.
성경의 말씀은 모두 다 복된 말씀이 된다. 구약은 십자가 사건을 설명하는 갈보리를 향한 달음질하는 말씀이며 신약은 갈보리 사건을 축으로 복음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사건의 죽음 장사 부활의 내용을 실제 생활에 설명하고 확장하고 적용시키고 있다. 이 단순한 원리로 하나님의 사람 사랑하심을 또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길을 설명한다.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사람을 특별한 존재로 만드시기로 계획하셨다. 사랑의 관계로 항상 교제하며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대신 다스리는 존재로 계획하셨다. 하나님의 道는 사랑이다.
그 사랑으로 사람을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가장 존귀한 존재로 만드셨던 것이다. 때문에 그 사랑으로 사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이루시고 준비해 놓으셨다.
십자가의 道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사람과 교제하심과 이루게 하는 영적원리이며 우주만물을 다스리며 번성케 하시는 이치다.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으로 침노한다. 즉 복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과 하나님 나라를 더 크게 이루게 하는 방법이라는 뜻이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복음은 잃어버린 참 자유와 평강을 찾는 길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이다. 복음은 모든 피조물을 번성시키는 방법이다. 그래서 복음은 사람이 복되게 살아가는 길이며 삶 그 자체를 하나님께 맡기고 드리는 하는 길이다.
때문에 살아 있는 믿음의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의 도를 그들의 생활 속에서 행하며 산다. 복음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다. 복음과 그리스도는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나타내시어 모든 민족으로 순종케 하셨다. 하나님의 섭리적 근본이치인 그리스도의 복음은 순간적으로 계획되고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나타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복음은 그리스도의 탄생과 실체를 보이시고 이루시기 시작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신 것은 믿는 자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신 것이었다.
그의 성육신은 사람을 죄로부터 구원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며 이미 창세전부터 계획하신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성경의 중심이다. 그는 복음으로 오셨고 복음의 중심에 계시며 전체이시기도 하다.
십자가에서 이루심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복음의 내용을 간략하고도 정확하게 이해시키기 위하여 회개와 세례와 성령으로 제시하였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을 복음의 공식으로 단순화, 조직화 하였다. 그리고 그의 서신 전체를 통하여 이 소식을 정밀화시키고 확장시켜 나갔던 것이다.
언약의 십자가 복음은 하나님의 계획 면에선 예정이나 하나님의 사랑 면에선 미리 아심의 약속이다. 성경 전체의 각 계약적 언약은 그림자를 통한 실체를 분명히 드러내기 위한 점진적인 계시이다. 하나님은 제일 먼저 아담과의 시작의 계약을 맺으셨던 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였다.
그 후 하나님은 노아와 보존의 계약의 관계에서 방주를 만들도록 말씀하셨고 노아는 순종했다. 방주를 만들고 그 방주에 들어오는 자는 누구든지 목숨을 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은 후 계약적 언약을 세워 주셨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믿음으로 이삭을 드려 약속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율법의 계약을 맺으셨다. 그리고 이 마지막 끝 날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모든 계약을 모두 통합시키시고 복음으로 새 언약을 나타내 주셨다.
율법은 약속의 실체가 아니다.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진다. 하늘 기업의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해서는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믿음은 성령으로 육의 마음에 심비에 세워지는 것이며 믿음으로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이 성령의 법이다.
이스라엘이 타락한 것은 하나님의 영을 따라 살지 못하여 하나님과의 언약을 버렸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복음을 주신 것은 무릎으로 사는 회개적 삶과 말씀으로 사는 세례적 삶과 성령을 따라 사는 임마누엘 작은 예수의 삶을 통하여 계약적 언약을 성취시키며, 신적 존재의 교회된 자들을 통하여 영원한 천국의 비밀을 완성시키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인 것이다.
창세전부터 계획하신 방법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는 수 천년 동안의 긴 기간에도 아주 조그마한 오차도 허용치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이 놀라운 계획과 예정하심 속에서 거룩한 새 창조에 참여할 사람들을 부르시고 그 부르심의 과정이 복음이다.
복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내셨지만 이미 영세 전부터 로고스로써 그의 생각과 사상 속에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그는 복음을 염두 해 두시고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다. 복음은 사랑을 구원하시려는 또 하나의 새로운 방법이 아니다.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창세전부터 계획하신 방법이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절정은 십자가의 사건이다. 십자가상에서의 "다 이루셨다"고 고백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자신이 대속자로 복음을 온전히 이루어 놓으셨다는 뜻이다. 그의 죽음은 이미 계획되어 있었다. 그는 이 세상에 죽기 위하여 오셨던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길을 스스로 가신 것이다.
십자가 사건은 인류의 모든 죄의 값을 다 지불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을 통하여, 모든 세상 죄의 대가로 치루시고 깨끗하게 청산하심으로써 다시 사람을 향한 계획을 회복시킨, 즉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을 회복시킨 엄청난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사실 세상의 어떤 보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귀한 사건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밭에 감취어진 보화였으며 그 보배로움과 가치를 알고 깨닫는 자마다 자기 소유 모든 것을 다 팔아 사는 것은 당연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계산할 수 없는 귀하신 보물이신 것이다. 이제 사람은 누구든지 구속의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값을 치를 필요가 없다.
기독교가 종교화될 때 값을 요구하고 값을 지불하려고 한다. 하나님의 마음과 소원을 알지도 못하면서 사람을 위한 종교적 탑을 쌓기 위해 세속적인 가치를 추구한다. 오히려 값을 지불하거나 요구되는 것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다.
단지, 하나님의 은혜를 순종으로 받아들이고 나의 삶을 위탁하며 동거 동락함으로써 응답하는 것 외에는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값으로 계산할 수도 없는 너무나 크고 엄청난 선물이기 때문이다.
신자의 삶 속에 경험해야 할 사건
사도 바울은 복음을 고린도전서에서 단순화, 조직화 시켜 법칙으로 선포하였다. 십자가의 사건은 사상과 상징으로 그치지 않는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그들이 복음을 증거 할 때 예수 이름과 예수의 십자가에 대하여 말했다.
그리고 예수 이름을 위하여 핍박 받고 고난당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오히려 기뻐했는데, 기억해야할 것은 예수에 대해 증거 할 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에 대해서 말했으며 그것이 그들의 삶의 방법, 삶 자체로 선포했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사 성육신하시어 예수 그리스도로 모든 사람들의 죄를 위하여 심판당한 곳이다. 그 십자가는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죽어야 할 심판의 장소였다. 십자가의 예수의 죽음은 우리를 대신하여 고통과 심판을 당하신 죽음이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의 현재완료 진행형이다. 십자가는 죽음의 장소이다. 다만, 예수의 죽음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십자가는 죽음을 확증하기 위하여 무덤의 세례와 연속된다. 무덤 속의 장사됨의 세례는 결코 십자가에 죽은 자가 다시 살 수 없음을 선포한다. 육신의 정욕에 따라 살던 옛 사람은 이미 땅 속에 묻혀 졌으며 존재하지 않음을 선언한다.
그리고 십자가는 부활에 연속된다. 부활 없는 십자가의 죽음은 헛것이 된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승리자이신 것이다. 부활은 성령으로 인도하심의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다. 영원한 삶과 연결되지 않는 십자가는 반쪽의 십자가이다. 십자가의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사건은 신자의 삶을 영원까지 연결시킨다. 그리고 영원한 삶은 지금 현재로부터 진행된다.
성령강림은 부활의 삶을 현재적으로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이다. 성령의 강림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극적 클라이막스이며 사람과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사랑의 결과이다. 성령의 강림으로 신자는 하나님과 함께 살고 함께 동행 하게 됨으로써 분명히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구원을 베풀기 위한 교리적, 일회적 사건으로만 있지 않는다. 새로운 피조물의 삶이며 사랑과 은혜의 표적이다. 그래서 초대교회 신자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에 대해 목숨을 걸고 증거 했던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었지만, 그러나 그 사건은 현재의 신자의 삶 속에 완성시켜 나가는 내용적 사건이 되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십자가의 도"라고 말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지혜이며 능력이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맛볼 수도 없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맛볼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밖에 없다. 왜냐하면‘믿음’은 영적인 하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십자가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평을 이루어 놓으셨다. 십자가는 복음의 중심이다. 십자가로 예수는 순종의 본을 보여 주셨다. 순종이 없는 십자가는 없는 것이다. 십자가는 내가 예수와 하나 되었음을 뼈저리게 체험케 하며 십자가로 말미암아 작은 예수가 되었음을 확신하게 만든다.
그래서 원수 마귀는 초대교회 이후 교회사 전체를 통해 십자가의 놀라운 사건과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진리를 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성경의 모든 사건들은 십자가 사건을 계시
신구약의 모든 사건들은 갈보리 십자가의 사건에 집중하고 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고백하였다. 십자가는 곧 순종의 시작, 신자의 삶 중심, 기독교의 진리, 전부, 생명이다.
십자가 없는 신자의 삶은 육신적, 정욕적인 삶, 어린아이처럼 세상 것에 질질 끌려가게 된다. 이런 신자는 감사함, 맡겨드림, 순종이 없다. 그런 신자는 종교적인 기독교는 만날지언정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계시적 삶을 살지 못한다.
그런 신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시고 고난당하신 참 뜻을 이해 못한다. 즉 생명 없는 형식만이 존재하는 종교인이 되는 것이다. 십자가 없이는 복음을 이야기할 수 없다. 십자가는 곧 복음의 내용이다. 십자가는 천국 백성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이다. 신뢰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교회는 부패하게 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고 선언했다. 십자가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완성될 수 없다. 십자가는 "구원받는 길"의 완성이다. 십자가는 그 외의 모든 영혼육의 것을 회복시키고 풍성케 하는 "다 이루는" 비결이다. 십자가 없이는 영생, 예수, 천국, 사랑, 은혜, 축복, 평안, 행복도 이야기할 수 없다. 모든 성경속의 사건과 이야기는 십자가에서 시작하고 만나며 완성시키는 것이다.
복음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
(1)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예수의 사역의 최대 절정은 이 세상에 죽으러 오심이다. 그의 죽음은 이미 구약과 공생애 사역 동안에도 수차례 전하셨다. 그의 죽음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죽음이었다. 구약의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 받은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유월절의 어린양은 흠 없는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는 온전한 것이 아니다. 다만 어린양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만민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 현재 믿는 자만이 아닌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않는 불신자를 위해서도 죄의 대가를 다 지불하셨다.
때문에 회개적 기도로 자신을 죽이며 돌이키는 자마다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다. 죽음의 회개는 옛 사람의 애굽적 구습을 벗어 버리고 비우는 거룩한 포기의 작업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로마의 압제 하에 있는 이스라엘을 위해 독립운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그 죽음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며 새로운 자아상에 이르기를 원했다.
(2)예수 그리스도의 장사되심
장사됨이란 죽음의 확증이다. 죽음의 확증은 믿음으로 받는 세례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장사됨은 옛사람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새 사람으로 출발하는 첫 걸음이다.
구약의 유월절은 애굽으로부터 탈출할 때에, 어린양을 잡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발라 생명을 보존한 사건을 기념하는 것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 죄의 심판으로부터 안전함을 상징한다. 그 다음 절기인 무교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급히 빠져나와 홍해를 건넌 기적을 기념한다.
무교절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그림자이다. 무교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장사되심과 참 교회를 상징한다. 마지막 7일째는 큰 성회로 드리는 날이다. 이 마지막 날 큰 성회는 홍해를 건너는 이스라엘의 무리를 뜻한다.
무교절의 마지막 날은 시기적으로도 홍해를 건넌 시점과 같다. 무교절 기간에는 무교병을 먹고 누룩의 모든 것을 버리는 날이다. 홍해는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 사망과 생명을 가르는 중요한 경계선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을 무사히 생명가운데로 인도하시고, 뒤따르던 애굽의 군대는 물속에 수장되었다. 결국 홍해는 이스라엘에는 생명의 통로였지만, 애굽인들에게는 죽음의 무덤이었다.
말씀을 믿고 순종한 이스라엘은 구원의 시점이었지만, 믿음이 없이 인본주의적인 애굽 군대는 심판의 죽음의 장소였다. 무교절 끝날 7일째 성회는 홍해를 건너는 무리들의 모임이다. 홍해를 건넘은 복음에 있어서 예수이름으로 받는 세례를 뜻하고 있다. 즉 세례는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따르는 자의 구원의 징표인 것이다.
이제 구원받은 자는 새로운 자아로 살아야 한다. 모든 죄의 결과는 십자가에서 다 청산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장사됨으로 믿는 자들의 죄를 영원히 장사지내버리셨다. 더 이상 죄의 노예도 아니고 거듭난 의인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다.
더 이상 모든 일을 나 혼자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내 삶은 이제 나만의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나와 동거하시는 하나님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귀의 궤계를 멸하시고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셨으므로 모든 성도들에게 모든 것을 다스리는 권세를 회복시켜 주셨다.
(3)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
십자가는 죽음과 부활을 다 포함하여 상징하고 있다. 하나님이 살리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다. 예수의 부활은 사망 권세를 제압하는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를 비롯한 사람들과는 다른 것이다.
그사람들은 잠시 죽음이 보류되고 생명이 연장된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 그 자체를 이기신 것이다. 부활은 영원한 생명과 관련되어 있다. 부활된 몸은 더 이상 죽음과 전혀 상관이 없다. 부활은 십자가의 승리의 표상이다. 승리의 결정은 부활에 있다.
예수는 부활로 사탄을 이기고, 죄와 죽음, 가난, 병듬과 슬픔을 이기시었다. 그는 승천하셨으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루어 놓으신 복음을 그의 백성들을 통하여 완성시키기 위해 성령으로 오셨다. 성령으로 오신 예수는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믿는 자들을 도구로 사용하시어 지금 이 순간에도 이루어 주신 복음을 신자의 삶 속에서 임마누엘로 완성하시고 계신다.
성령의 임재는 구원의 시작이며 새 생명의 시작이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하나님의 우주 창조 목적의 결실이다. 세례는 구원의 징표이지만 성령은 구원의 실체다. 성령은 그의 백성을 인도하고 계신다. 성경말씀과 그의 레마적 음성으로 인도하고 계신다. 이것이 성령의 법이다. 성령은 감화 감동에서 충만함으로 그의 백성들을 이끌고 계신다.
앞날에 대해 걱정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로 승리의 삶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이미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에게 준비되어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축복은 이미 준비되어 있고 예비 되어 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성령의 방법으로 성령께서 주신 꿈과 비젼을 향하여 나아가면 된다. 그 속에서 사람을 통하여 이루시려고 계획하셨던 섭리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지금도 멈추지 아니하시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를 통하여 그의 경륜을 이루시고 계신다.
복음이 지향하는 영성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참 뜻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 구원시키며 이 세상에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도록 하는 데 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임마누엘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신자의 삶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야 한다. 마귀는 사람의 눈과 귀를 가리고 "첫째 자리"를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주도록 미혹한다. 사람들은 교묘한 이런 영적 전투에서 지고 있다. 결코 마귀는 신자를 한 순간에 십자가로부터 멀어지도록 시도하지 않는다. “먼저 신앙”은 세상의 문제들도 더불어 해결해 주시고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케 하는 비결이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세상 모든 만물들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권세가 이미 주어져 있다. 그러나 이기적이고 육신적인 나만을 위한, 부족함이 없이 사는 넉넉함, 소위 세상의 축복을 온전히 보장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참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먹고 마시는 것을 나의 가족과 내 주변의 이웃을 위하여 나누는 것이 될 때 하나님이 허락하신 참 복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 뿐만 아니라 내일과 영원한 시간으로까지 누리는 축복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주어진 권세로 많은 것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는 영적인 지혜가 필요하다. 신령한 음료는 신령한 반석이신 그리스도 예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내 곁에 성령으로 계셔서 나와 함께 동행하고 계신다.
참된 축복은 하늘에 있는 것이다. 신자는 하나님의 기업이다. 신자는 하늘의 것을 유업으로 얻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나님은 허락하신 것과, 채워주신 것으로, 나누어 주고 베풀어 예수 이름을 전파하고 복음의 일꾼 되라고 권고하신다.
믿음의 결과는 땅에서 보상받는 것이 아니다. 물론 신자는 땅에서도 잘 되지만 그것이 목적과 목표가 될 수 없다. 목적과 목표는 예수 바로 그분 자체이며 미래에 있을 천국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투자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사업은 영원한 것과 영혼 구원을 위한 사업들이다.
이런 사실을 아직 깊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영안이 어두운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명령하신 영혼구령 사명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원수 마귀는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 알고 갖가지 속임수의 궤계를 부려 신자들의 구령사명을 방해한다.
신자들 중에는 이런 치열한 영적 전투에 뒷짐 지고 모른 체 하는 자들이 있다. 하나님은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우주만물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셨으나 그것은 창조의 마침이 아니라 새 창조를 위한 창조였다.
새 창조는 창세기의 옛 창조를 기반으로 더 새롭고 완전한 창조로서 새 일을 계획하시고 진행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함께 동역하는 것 그것이 임마누엘의 영성이며 우리는 이들을 작은예수라고 부른다. 새 창조는 미래에 임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지는 창조이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질 새 창조는, 예루살렘 성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받으며 자기 영광을 가지고 살게 될 거룩한 백성을 위한 새 일이다. 거기서 구원 받은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석이 될 것이다.
그래서 영원히 그와 함께 살게 될 것이다. 썩지 않는 몸으로 변화된 상상을 초월한 놀라움의 새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다시 밤이 없는 곳, 주 하나님이 영광의 빛을 비춰 주시며, 세세토록 새 하늘과 새 땅의 백성으로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에 거하는 땅의 왕으로 사는 새 천지가 될 것이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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