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십자가-하나님의 능력(고전1:10-2:5)
김희성 교수(서울신대/신약학)
1.서론
1.고린도 도시
2.고린도교회의 설립
3.바울과 고린도교회의 관계
4.고린도전서의 집필동기와 고린도교회의 상황
5.바울의 문제 해결방법과 신학적 주제
6.서신의 첫번째 단락(1:10-4:21)의 내용과 구조
2.본문분석
3.본문 전후의 문맥
1:10-17 공동체 분열
1:18-25 십자가의 말씀
1:26-31 형제들을 부르심
2:1-5 바울의 선포방법
부록 : 고린도 교인들의 분열극복을 위한 바울의 노력
1.고린도 교인들의 일치를 향한 권고
2.분열극복을 위한 바울의 변증(1)
3.분열극복을 위한 바울의 변증(2)
4.개괄적 주석
1.본문분석
2.본문의 짜임새
3.본문주석
요약
5.본문의 적용
고린도전서는 신약 성경 중에서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기독교인에게 유용하고, 가장 귀중한 문서이다. 만약에 복음에 대하여 가장 충분하게 신학을 진술한 서신을 로마서라고 한다면, 지역교회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신학적 해답을 다룬 서신은 고린도전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서신은 사람이나 제도나 관행이나 이념 등을 비판하고 그것들을 올바로 세우는데 의도적으로 사용되었던 신학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대단한 가치가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서신에 반영되어있는 상황적인 문제에 대하여 신학적 확신을 적용하는 방식은 우리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교회에 나타난 문제점들 가운데 몇 가지는 현대 한국교회에 나타난 문제점들과 아주 유사해서 바울이 채용한 방식을 어려운 해석작업과 적용과정을 거치지 않고 거의 그대로 채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는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가르쳐주는 바가 가장 많은 서신이다. 이 서신을 다룰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이번 강의가 한국교회의 문제점들을 해결하고 기독교인의 신앙을 보다 견고하고 가장 아름답게 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고린도 사람처럼 행한다"라는 말이 "간음하다"를 뜻하는 말이 될 정도로 악과 성적인 부도덕이 판을 치던 부유한 고대 도시 고린도는 B.C. 146년 로마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100년이 지난 후 시저(Caesar)는 그 도시를 로마의 식민지로 재건하였다. B.C. 29년부터 재건된 고린도는 총독의 거주지이자 아가야 지방의 수도가 되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선교할 A.D. 50년 즈음에 고린도는 이미 인구 50만 명이 넘는 국제적인 대도시가 되어 있었다.
고린도는 지리적으로 희랍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잇는 모래시계의 목과 같은 좁은 지협에 위치하여 북부 본토와 남부 반도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의 요충지였다. 또한 이 도시는 두 개의 항구를 - 동쪽의 겐그레아와 서쪽의 레케움 - 보유하여 동부와 서부를 잇는 중요한 항구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동서의 무역로와 남북의 교통로가 만나는 그리스의 중심부인 고린도는 상업적으로 뛰어난 역할을 했다. 헬라의 동서남북 사방에 흩어져 있는 모든 물품이 이곳을 통해서 운반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 고린도는 헬라의 교량역할을 하는 도시였다. 그렇지만 고린도는 모든 다른 국제적 무역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온갖 범죄와 타락된 행습들로 만연한 도시였다.
게다가 이 도시의 남쪽에는 천험(天險)한 요새인 거대한 바위산으로 된 해발 560M의 고린도 산이 있고, 여기에는 아크로폴리스인 아크로 코린투스가 있었으며, 그 중앙에는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었다. 가장 전성기 때에 이 신전에는 낮에는 사제로 일하고 밤에는 접대부 역할을 하는 여승려들이 천명 이상 있었다고 한다. 이들 여승려들과 성적인 관계를 갖는 것이 예배의 한 행위가 될 정도로 그 당시에는 성과 종교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러한 환경은 자연히 고린도인들을 방탕한 자들로 만들었고 성적으로 부패하게 만들었다. 한 세기가 지난 당시의 이러한 새 고린도는 부도덕하다는 옛날의 오명에서 벗어는 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좋은 평판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바울 시대의 고린도는 그 시대의 어느 다른 큰 항구나 무역 중심지와 마찬가지의 타락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A.D. 49년 경 바울은 2차 전도여행 중에 안디옥으로부터 마게도니아(빌립보와 데살로니가 지역)와 아테네를 거쳐서 고린도에 도착했다. 그는 이 도시에 일년 반 정도 머물면서 사역하였다. 그의 동역자는 실루아노와 디모데였다. 바울은 관습대로 처음에는 유대인의 회당에서 가르쳤다. 고린도에 유대인이 있었고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다는 사실은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한 비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 비문에는 "히브리인의 회당"이라는 말이 씌어있는데 그것은 회당문 위에 가로 놓였던 상인방돌의 일부분으로 확인되었다. 이 비문이 행 18장 4절("그는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변론하였다")을 충분히 확증해준다. 그런데 바울은 유대인과의 갈등이 야기된 후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서 가르쳤다. 그리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함께 천막 치는 일을 하여 자신의 생계를 꾸려나갔다. 이러한 바울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의 급성장하는 교회가 생겼다. 이 교회는 이방 기독교인들로 구성되었고, 대부분은 하층계급 출신들이었으나 사회적으로는 상류계층도 있었고, 유대 기독교인들도 출석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그의 첫 서신인 데살로니가전서를 썼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에베소로 건너간 후 거기서 고린도전서를 기록했다. 바울이 고린도를 떠난 이후에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인 아볼로가 이곳에서 제법 오랫동안 목회활동을 하였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설립했을 뿐만 아니라, 고린도를 떠난 이후에도 사람들과 서신 왕래를 통하여 그 교회와 계속 유대 관계를 가졌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고린도전서와 후서가 태어나게 된 것이다. 그런고로 고린도전후서가 어떠한 배경에서 집필되었고 어떠한 성과를 얻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는 바울과 고린도 교회와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그 관계를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은 학문적으로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바울이 A.D. 49년 이후에 고린도에 와서 체류하며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개척하였다(행18:1이하 참조). 왜냐하면 바울이 고린도에 와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났는데 이들은 "모든 유대인은 로마에서 떠나가라"라는 글라우디우스 황제의 칙령(49년)에 따라 로마에서 추방당하여 고린도에 와 있었기 때문이다.
2) 일년 반 후에 바울은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로 갔다(행 18:18이하).
3) 그가 거기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음행을 하는 부도덕한 교인들과의 교제를 금하는 편지를 보냈다(고전 5:9 참조). 그러나 그 편지는 남아 있지 않다. 일단의 학자들은 고후 6:14 - 7:1이 그 편지의 단편일 것이라고 믿고 있다.
4) 그는 에베소를 여행하던 "글로에의 집" 사람들을 통하여(고전 1:11) 고린도 교회가 여러 파로 나뉘어 있음을 듣는다.
5) 그 무렵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편지를 받는데, 아마 교회의 대표자로서 스데바나, 브드나도, 아가이고가 가지고 온(고전 16:15-18) 편지였을 것이다. 이 편지에서 그들은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조언과 지도를 부탁한다(고전 7:1).
6) 그는 고린도전서로 알려져 있는 편지를 써서 고린도 교회의 파당적 현실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이 편지로 조언을 요청한 문제들에 대해서 답한다. 이 편지는 디도가 가지고 간다[고후 12:18 참조; 그러나 이 구절은 그가 "눈물의 편지"(고후2:4 참조)를 가지고 간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는 편지를 전한 후 곧바로 바울이 있는 에베소로 돌아온다. 이 편지는 효과면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7) 디모데가 특별한 사명을 띠고 고린도로 보냄을 받는다(고전 4:17; 16:10).
8) 그 동안 고린도에는 유대인 밀사들이 당도하여 그로 인하여 심각한 위기가 닥친다. 바울의 권위가 도전을 받는다(고후 10:10; 11:23; 12:6이하). 디모데는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줄을 몰라 당황하며, 그런 소식을 가지고 에베소로 돌아온다.
9) 디모데의 보고를 접한 후 바울은 큰 슬픔을 안고 잠시 고린도를 방문하여 몸소 그 문제를 처리하고자 한다. 그는 나중에 이 방문을 "고통스런 방문"(고후 2:1)으로 언급한다. 그는 교회 앞에서 굴욕을 당하며, 극심한 고민에 빠진 상태에서 에베소로 돌아온다.
10) 이제 그는 스스로 큰 희생을 감수하면서 강력한 항의의 편지를 써서 그 위기 상황에 대처하려고 한다(고후 2:4; 7;8). 이 편지는 "눈물의 편지" 혹은 "심각한 편지"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 역시 현존하지 않거나 아니면 고린도후서 10-13장에 부분적으로 보존되어 있을 뿐이다. 바울은 디도에게 로마에서 그와 만나자고 한다.
11)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니아로 향한다. 그는 드로아로 오지만, 거기서 디도를 만나지 못한다. 결국 그가 디도를 앞질러 마게도니아로 간다(고후 2:12이하).
12) 바울은 디도를 만나고 그로부터 이제 최악의 상황은 지나갔으며 그를 배척하던 분위기도 가라앉았다는 기쁜 소식을 듣고 대단히 반가워한다(고후 7:6-16).
13) 그는 고린도후서로 알려진 편지를 쓴다. 이 때에 그는 이 편지 전체를 썼거나 아니면 고린도후서의 일부분(고후 1-9장)을 썼을 것이다. 바울은 이 편지를 마게도니아에서 디도 편으로 보내면서 다른 두 형제로 하여금 그를 수행하도록 한다.
14) 바울이 몸소 세 번째 고린도에 간다(행 20:2).
고린도전서는 바울과 고린도 교회와의 이러한 관계 속에서 태어났다. 이 서신의 가장 중요한 저작동기는 고린도 교회가 사도 바울에게 보낸 일련의 문제들에 대한 서면 질문(7:1 -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이었다. 바울은 그 질문뿐만이 아니라 글로에 집 사람들로부터 들은 문제들에 대하여 답장을 쓴다. 그런데 이 답장에서 그는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과 삶에 관한 서로 다른 문제들을 취급하기 때문에, 개별 단락들 사이에는 별로 연관이 없다. 1:10이하; 5:1이하; 6:1이하; 11:8이하; 15:12이하에서 바울은 교회에 대하여 들은 문제들을 다룬다. 그리고 periV dev(무엇에 관하여는)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단락들, 즉 7:1이하; 8:1이하; 12:1이하; 16:1이하에서 고린도 교회의 편지에서 제기된 질문들에 대해 답하고 있다.
이러한 소식들과 편지에서 제기된 문제들을 중심으로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재구성해보자. 가장 오래된 문제부터 살펴보자면, 바울이 보낸 첫 번째 서신에서 이미 경고했던 것으로서 고린도 교회는 출교해야 할 성적으로 문란한 교인들을 아직도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어떤 기독교인은 교회로부터 아무런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의 계모와 함께 살고 있었고(5:1-5), 몇몇 사람들은 계속 고린도의 사창가를 드나들었다(6:15-20). 그 반면에 몇몇 교인들은 금욕주의자로서 혼인과 모든 성적인 생활을 죄로 여겼다(7장). 어떤 이들은 스스로 성숙한 영적인 사람임을 자랑하면서도 사소한 일상생활의 분쟁을 가지고 법정에 호소하는가 하면(6:1-8),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가 제공되는 식사 초대에 응하기도 하였고, 이교 사원의 만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8:1이하). 성찬 때에 부자들은 자기들이 가져온 음식과 음료로 배를 채우는데 급급한 반면, 가난한 자들은 허기진 채로 남아 있었다(11:17-34). 교회의 예배는 무질서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몇몇 여자 신도들은 예배 시에 머리에 모자를 쓰는 부당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고(11:2-16), 또 다른 사람들은 방언을 기독교의 최고의 "유일한" 은사로 생각하면서 예배 시에 그것을 남용했기(14:23) 때문이었다. 교회의 일부 사람들은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기독교적 신앙과 신학을 부정하기도 하였다(15:12-19). 그러나 무엇보다도 심각했던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각기 파당을 지어 서로 분쟁을 일삼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바울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결코 획일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해결책을 제시할 때 우선 다양한 문제에 따라서 교회의 청중들을 다양하게 구별한다. 그리고 거기에 알맞은 적절한 해답을 제시해 준다. 이 때도 그는 그의 진술의 중요성을 다양하게 구별한다. 그는 해결책을 제시할 때 절대적으로 지시만 하거나 명령만 하지는 않는다. 문제의 심각성 정도와 문제를 갖고 있는 사람의 종류에 따라서 거기에 적합한 명령어를 사용하여 때에 따라서는 명령도 내리고, 권고도 하며, 자기 의견이라고 밝히고, 자기가 원한다고 말하기도 하며, 주의 명령이라고 추천하기도 한다. 이러한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바울은 교인들에게 반발을 사지 않으면서도 그들에게 영향을 주어 그들의 행위를 바꾸고자 했다.
이러한 방법으로 여러 가지 문제들의 해결책을 제시한 고린도전서에는 어떤 일관된 사상의 발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상황적이고 실제적인 문제에 직면하여 복음의 깊은 내용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다시 말하자면 상황에 복음을 적용하려는 바울의 신학적 노력이 반영되어 있다. 일단의 학자들은 이러한 고린도전서의 주제는 부활을 강조하는 영광의 신학이라고 주장한다. 그 반면에 다른 학자들은 십자가를 강조하는 고난의 신학이 주제라고 한다. 그러나 본 서신은 복음의 한 면만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어진 복음의 양면을 함께 강조한다. 분명히 이 서신이 다루는 중요한 주제는 1장의 십자가 신학으로부터 시작하여 15장의 부활 신학으로 끝난다. 우리는 이 두 장 사이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매우 뛰어난 설명과 그 적용을 찾아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언급하는 서신의 전반부에서 기독인의 성결이 강조된다면, 부활이 마지막에 서있는 후반부에서는 사랑이 그 절정인 성령의 은사가 강조되고 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는 십자가와 부활 복음으로 꽃피는 사랑의 삶이 신학 주제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6. 서신의 첫 번째 단락(1:10-4:21)의 내용과 구조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여러 문제들 중에서 가장 크고 본질적인 문제가 교회 분열이라고 보고 이 문제를 서신의 맨 첫 단락(1:10-4:21)에서 길게 다룬다. 이 단락은 다음과 같은 내용과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1:10-4:21 지혜 중시로 인한 교회 공동체의 분열의 문제에 대한 해답
1:10-17 고린도 교회의 분열 양상과 분열의 무의미성
1:18-2:5 교회와 사도의 근거와 판단범주로서 십자가에 관한 말씀
1:18-25 세상지혜의 반제로서 십자가에 관한 말씀
1:26-31 십자가에 관한 말씀의 반영으로서 공동체 형성
2:1-5 십자가에 관한 말씀에 대한 상응으로서 사도의 선포와 등장
2:6-16 복음에 숨겨진 하나님의 지혜와 성령을 통한 지혜의 인식 : (부록)
3:1-4 미성숙의 실증으로서 교회의 분열
3:5-4:21 사도와 교사의 참된 과제와 의미
3:5-17 선포자의 봉사, 일치, 종말론적 책임
3:18-23 자랑, 세상의 지혜와 교사들로부터 교회의 자유
4:1-5 사도에 대한 그리스도의 배제적 판단
4:6-13 십자가 그늘 아래 있는 사도적 실존
4:14-21 신앙의 아버지를 본받으라는 결론적 권고
이 첫 단락에서 바울은 공동체의 분열 문제를 다루며 우선적으로 십자가의 도를 논증한다. 그것은 그가 고린도인들의 지혜 추구를 통해서 야기된 교회 안에서의 분열이 그리스도의 몸의 통일성을 위협하며 복음의 기초를 뒤흔드는 엄청난 파괴적인 의미가 있다고 판단하고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하고 중차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고린도 교인들의 분열은 그들이 세상적인 지혜로 복음 전하는 자들을 평가하고 그들을 추종하면서 발생한 것이었다. 그들은 복음과 복음을 전하는 자와 복음을 듣고 기독교인이 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치명적인 교회의 분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그 문제를 야기시킨 세상적 지혜를 자신의 신학의 중심인 "십자가의 복음"으로 반박하면서 그의 십자가 신학을 전개한다. 이 십자가 신학은 궁극적으로 1:18-25에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1:10부터 3:4까지를 고찰해야 하나 시간상 그것은 문맥으로 처리해서 다루고 본문만을 한정하여 주석 하도록 하겠다.
18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나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9 성경에도 "내가 지혜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기를 헛되게 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0 지혜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율법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대의 대변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만든 것이 아닙니까?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 이 세상은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22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습니다.
23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이것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24 그렇지만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25 왜냐하면 하나님에게 있어서 어리석음이 인간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에게 있어서 약함이 인간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의 본론의 첫 문단을 "같은 말을 하고 분열이 없도록 완전하게 합하라"는 권고(10절)로 시작한다. 이 권고는 교회에 분열이 있음을 전제한다. 다음으로 그는 고린도 교회에 다툼이 있다는 것을 글로에 집 사람들로부터 들었다는 것을 밝히고 분열의 양상, 즉 당파의 종류에 대하여 언급한다(11-13절). 이어서 바울 자신은 파당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세례조차도 별로 준 적이 없다(14-16절)고 회상한 후, 자신이 파송된 이유를 제시한다. 그는 세례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파송되었다고 말한다. 이 파송 이유에 따라서 바울은 분열의 원인인 말의 지혜가 십자가를 헛되게 하지 않도록 수사학적이고 지혜로운 말을 쓰지 않고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다고 설명한다(17절).
이어서 바울은 18절에서 "십자가의 말씀"에 관한 정의를 내린다: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 정의 다음에 바울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폐하겠다는 구약을 증거로 인용한다(19절). 이어서 그는 구약의 인용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셨고(20절) 전도의 미련한 방법을 통하여 구원을 얻게 하셨다(21절).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전한다(23절). 이 그리스도가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설파한다(24절). 사도 바울은 이처럼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가 약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나타나지만 인간보다 더 강하고 더 지혜로운 하나님의 능력이며 지혜라고 설명한다(25절).
이 문단에서 바울은 고린도의 공동체 형성이 어리석음과 약함의 상징인 십자가에 상응한 것이라고 논증한다. 바울은 26a절에서 그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고린도 교인들의 경험을 예로 든다. 그는 우선 가난하고 미련하고 천하고 멸시받던 고린도 교인들이 십자가에 대한 선포의 결과로서 부름을 받아 교인이 되었음을 상기시킨다(26절). 바울은 그들이 교인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어리석음과 약함의 표시인 십자가에 걸맞게 사회적으로 비천한 자들을 택하셔서 세상의 지혜롭고 강하고 귀하고 존경받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했기 때문(27-28절)이라고 그 이유를 들고, 그것은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 자랑치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29절)고 그 원인을 밝힌다. 이어서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교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라는 것과 그리스도는 기독교인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는 사실을 밝히고(30절),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하라는 말씀으로 이 문단을 끝맺는다(31절).
이 문단에서 바울은 자신의 선교와 등장도 모든 세상의 가치를 전도시킨 십자가와의 일치 때문에 세상지혜를 단념하고 성령의 능력에만 의지했다는 것을 논증한다. 1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예로 든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에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달리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으며, 복음을 전할 때 십자가에 대한 상응으로서 지혜의 말로 전하지 않았으며(2절), 약하고 두려워하며 심히 떨면서 오로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했다"고 한다. 이 증언의 끝에서 바울은 자신이 그렇게 한 이유를 밝힌다. 그것은 믿음이 인간의 지혜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3-5절).
이상에서 본문의 문맥을 요약하면, 본문은 분열을 없애고 하나가 되라는 권고로 시작하기 때문에 분열 문제의 해결이 본문의 관건이 된다. 이 분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바울은 십자가 신학을 도입한다. 분열의 원인인 인간의 지혜가 십자가를 헛되게 하기 때문에,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도록 말의 지혜를 사용하지 않는다. 이어서 십자가의 말씀에 대한 정의가 나온다: 십자가의 말씀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나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말씀대로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셨기 때문에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지혜인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 구원을 위한 새로운 방법을 택하셨다. 그것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전도의 미련한 방법이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자는 이 방법에 따라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선포한다.
연이은 두 단락(1:26-31; 2:1-4)에서 바울은 십자가에서 발생한 세상의 모든 가치들의 전도(顚倒)가 부름 받은 자들을 통한 공동체의 형성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등장과 선포에도 시종일관하게 관철되고 있음을 논증한다. 부름을 받았을 때 고린도 교인들은 사회적으로 비천한 자들이 태반이었다. 그들이 기독교인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사회적으로 비천한 자들을 택하셔서 세상의 지혜롭고 강하고 귀하고 존경받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리석음과 약함의 표시인 십자가에 상응하는 것이다. 고린도 교인들의 부르심뿐만이 아니라 바울 자신의 등장과 선포도 세상의 가치를 전도시킨 십자가에 상응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십자가와의 일치 때문에 세상의 수사학적 지혜를 단념하고 성령의 능력에만 의지하여 복음을 선포했다.
본문의 문맥에서 강조되는 것은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로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가 인간 구원을 위한 길이라는 사실이다.
이 문맥 다음에 십자가의 복음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지혜와 그것의 의사소통에 관한 문단(2:6-3:4)이 따라온다. 하나님의 지혜는 시간 이전에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정하여졌었고 비밀하게 감추어졌던 것이다. 초월적인 지배자들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것이 십자가에 나타났다. 십자가로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만 인식된다. 성령에 속한 자만이 이것을 알 수 있고 분별할 수 있고 선포할 수 있다. 육신에 속한 자나 육에 속한 자는 알 수 없다. 복음 전하는 자는 영에 속한 자로서 아무에게도 판단 받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영을 갖고 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영에 속한 자가 아니라 아직도 육에 속한 자이다. 미성숙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에 대하여 잘 모른다. 그러기에 그들 사이에 분쟁과 시기가 있다. 교회의 분열을 도모하는 그들은 진정 육에 속한 자이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교회의 분열은 육에 속한 자, 미성숙한 사람임을 실증하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사도와 교사의 참된 과제와 의미를 다루는 다음 문단으로 넘어간다. 다음 문단에서 바울은 복음전하는 자로서 파당의 우두머리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존재이며 서로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를 3:5-4:21에서 길게 다룬다.
본문에서 주제로 다루어진 십자가의 복음이 교회의 분열 문제를 극복하려는 문맥에 들어있기 때문에 부록으로 "고린도 교인들의 분열극복을 위한 바울의 노력"을 살펴보자.
사도 바울은 교회에 파당과 분열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괴로워하며 그 문제를 맨 처음 1:10-17절과 3:1-23에서 다룬다. 그 문제를 언급하기 전에 바울은 가장 먼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diaV tou' ojnovmato" tou' kurivou hJmw'n jIhsou' Cristou') 형제들에게 권고한다. 이 권고의 배후에는 확실히 그리스도가 서있고 "이름을 통하여"란 어귀에는 권위적인 기능이 있기 때문에, 바울만이 여기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ejn tw'/ ojnovmati) 그리고 그리스도 대신에 명령하는 자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그리스도가 현재적으로 권고하고 있다. 이 권고는 모두가 일치되는 말을 하여 그들 가운데 분열을 없애라는 것이다. "모두가 일치되는 말을 하여"란 어구는 평화스런 공존을 의미하지만 내용적으로는 바울이 이전에 교회에 전한 근본적인 고백,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주가 되셨고 모두는 그에게 속해있다는 것을 말하라는 것 이외에 다른 뜻이 아니다. 이 어구가 여기에 사용된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각기 다른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다른 말을 하는 것은 분열의 표현이다. 바울은 그들이 이와 같은 분파적인 다른 말들을 하지 말고 일치되는 말을 하여 그들 가운데 분열이 없길 바란다. 여기서 분열(scivsmata)이라는 것은 찢어짐, 갈라짐을 의미한다. 이 공동체는 바울에 따르면 이미 분명히 위험할 정도로 분열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각각 다양한 권위 있는 지도자에 속해 있다고 하며 이 지혜 지도자 혹은 저 지혜 지도자에게 열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 내에는 파당, 분파 혹은 패거리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분열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교회가 해체되거나 공동 집회나 성만찬이 무산되지는 않고 있었다. 이렇게 교회의 분열에 대한 위험이 그렇게 큰 곳은 없었기 때문에 바울은 매우 긴박하게 고린도 교인들이 다시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으로 완전하게 합하기를 권고한다. 이 권고 다음에 그는 본격적으로 분열극복을 위한 변증에 진력한다.
우선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난 분열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세 가지 수사학적 질문들을 던진다. 이 수사학적 질문들은 모두가 아니오라는 대답을 강요한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누어졌습니까?"라는 첫 번째 질문은 그리스도는 나뉠 수 없는 분이지만 고린도 교회는 마치 그가 나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점을 힐책하고 있다. 다음으로 "바울이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렸습니까?"란 질문은 십자가의 신학을 도발적으로 사용하면서 십자가에 달린 분은 바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대속적인 죽음을 통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리스도만이 공동체의 유일한 기초이다. 기독인들은 그들을 위해서 돌아가신 그 분에게 속해 있고 그 분을 위해서 산다. 이것이 세례시 중재된다. 두 번째 질문은 자연스럽게 세 번째 질문과 연결된다. "여러분이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이 질문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실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면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세례 이해를 일깨우고 있다: 세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세례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사건 안으로 편입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어 그들의 주이신 그리스도께 속한다.
이렇게 세 가지 수사학적인 질문을 한 후에 바울은 놀랍게도 자신이 그리스보와 가이오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세례를 주지 않은 것과 자신은 세례를 베풀기 위하여 사도로 파송된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을 선포하도록 보내심을 받았다고 밝힌다. 바울에게 있어서 세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그것이 그의 소명이었다. 이것을 밝히면서 바울은 그가 설교한 복음의 내용과 설교 방식에 대한 암시를 덧붙인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도록 말의 지혜로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고 한다. 즉 십자가가 수사학적 논증과 변증법적 난해함의 영향 아래서 힘을 쓰지 못하게 되지 않도록 수사학적 기교를 쓰지 않고 십자가의 복음을 전한다는 말이다. 바울에 의하면 설교는 십자가의 선포다. 십자가야말로 설교의 권능의 원천이다. 설교가 인간의 수사학적 기교를 너무 분명하게 구사한다면 십자가의 설득력은 충분히 드러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능숙한 언변의 형식적 특징으로서의 지혜는 결국은 십자가가 어리석은 것으로 보이게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수사학적 기교로서의 지혜를 거부한다.
바로 이 말의 지혜에 대한 고린도 교회의 과대 평가와 그것을 사용하는 지도자들에 대한 과대 평가가 고린도 교회의 파당 형성의 동기가 된다. 말의 지혜는 십자가를 헛되게 하고 십자가의 능력을 빼앗는다. 그것은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추종자를 만든다. 그리하여 공동체를 파당과 학파로 분열시킨다. 바울은 분열 현상을 근본적으로 복음의 핵심으로부터 비판한다. 교회의 일치는 단순한 어떤 이상이 아니다. 혹은 다양한 파벌 사이의 타협도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실성이다. 그것을 찢는 자는 그리스도 자체를 찢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이루어진 구원과 그에 대한 결합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이 양자는 세례에서 최종적으로 유효하게 된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교회의 일치와 세례를 통해 근거지어진 그리스도에 대한 종속성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는 곳에서는 분열은 불가능하다. 교회의 일치는 신학적 학파의 전승이나 교파의 일치가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십자가와 세례가 보장한다.
사도 바울은 고전 3:1-23에서 다시금 분열의 문제를 다룬다. 그는 먼저 고린도 교인들 사이에 시기와 다툼과 분열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인간적인 표준에 따라 사는 육에 속한 자라고 정의한다. 다음으로 그는 고린도 교인들이 추종하던 지도자들은 무엇인지를 규정한다.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그들의 특별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주님의 종들이다. 바울은 씨를 심었으며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 그러나 영적으로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과 견주어 볼 때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들은 다 동등한 하나님의 종이다. 그들 중 누구라도 하나님의 다른 종들보다 우월한 자로 간주될 수 없다. 이는 그들이 모두 다 공동의 선교 동역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라는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다. 여기에 주의 종의 가장 높은 자의식이 반영된다.
그런데 한 사역자를 다른 사역자보다 더 훌륭하고 더 권위 있는 자로 여기는 것은 분열의 원인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시려는 주님의 계획에 누를 끼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인들은 인간적인 표준에 따라 다투고 분열하면서 누구의 편이라고 패를 가른다. 바울은 이들에 대하여 3장 22-23절에서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상이나 삶이나 죽음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입니다"는 말로 파당 일반에 대한 통일의 원리를 가르치고 있다. 이 말씀에 따르면, 기독인은 어떤 인간 존재의 - 유명한 설교자나 선교자의 - 소유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마저도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기독인은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리스도만이 그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치르고 그들을 사신 그들의 주님이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런 까닭에 기독교인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 그런데 그들 자신이 어떤 인간에게 속하여 있다고 자랑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고린도 교인들은 육신에 속한 자이지 영에 속한 자가 아니다. 시기와 분쟁이 그들 가운데 있다. 그들은 자신이 성숙한 영적인 사람들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평범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행동하고 있다. 보다 높은 지식과 성령의 은사를 가진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들을 "영적인" 특별한 존재라고 강조했으며 그러한 의미에 있어서 그들 자신을 "성숙한 자들"이라고 주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바울은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은 성령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뜻과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기는 사람들이라고 대답한다. 그에 따르면 고린도 교인들은 영적인 자라고 하나 사실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이고, 영적으로 장성한 자라고 하나 미성숙한 자이며, 지혜로운 자라고 하나 어리석은 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밭이고 하나님의 집, 즉 하나님의 성전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당파문제와 5-6장의 성 문제를 염두에 두고서 그들에게 일치성과 거룩성을 다음처럼 강조한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결론적으로 바울은 이 부분에서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은 성령을 통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게 되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하나의 신앙고백 안에서 교회의 일치를 이루어가려고 하며,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과 변증의 한 가운데 십자가의 말씀에 대한 본문이 서있다.
본문에는 십자가의 말씀과 세상의 지혜와의 반제(反題)가 전면에 서있다. 이 반제에 따라 전체 문단이 표제어인 지혜(19, 20, 21, 22, 24절; 비교. "지혜로운" - 19, 20, 25절)와 하나님으로부터 그것의 폐기에 의하여 지배를 받는다. 지혜와 어리석음 혹은 어리석게 만듦(20b, 21절)의 반제, 거리낌과 어리석음 대(對) 능력과 지혜(23f)의 반제, 멸망하는 자와 구원 얻는 자(18절)의 반제 그리고 하나님과 세상 내지는 하나님과 이 세대 내지는 인간(20, 21, 25절)의 반제가 서로 만난다.
인상적인 것은 원인절 접속사(18a, 19a, 20a, 22a, 25a절)가 본문을 관통한다는 사실이다. 이것들은 바울이 지혜에 대한 모든 비판에서 십자가의 거리낌과 어리석음이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으로 나타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바울은 최초의 근거로서 성경을 증명으로 인용한다(19).
18절은 논제적으로 서로 대조적인 관계 안에서 "십자가에 관한 말씀"을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나, 병행적인 "우리"를 통하여 더 상세히 규정되는 "구원받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특성을 부여한다.
19절은 일반적인 인용어투로 도입된 성경말씀(교차대조로 구성된 기억 병행구)을 그 이유로 든다. 이 구절에서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에 관하여 선언된(그러나 미래에 이루어질) 폐기가 다루어지고 있다.
20절은 그 인용의 말씀을 네 개의 수사학적인 질문들로 - 그것들 가운데 앞의 세 개는 수사학적으로 영향력이 많이 있게 서두에 반복되는 pou'(어디에?)를 통하여 도입되는데 - 확증하고, 그럼으로써 성경말씀의 실현을 확고히 한다. 이때 19절의 미래와는 달리 현재(20a, c절)와 단순과거(20d절)가 사용된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은 것으로 만드셨다는 것을 위해서 21a절이 사실적인 근거를 제공한다(ejpeidhV - 왜냐하면): 세상은 자기의 지혜로 하나님을 인식하는데 실패했다. 그리고 하나님(주어)은 21b절에 따르면 세상의 지혜에 케리그마의 어리석음이 맞서도록 해서 구원의 주도권을 세상의 방법에 대항시켰다.
22절은 현재에서 세상의 판단으로 시선을 돌려서 유대인의 표적요구와 그리스인들의 지혜 탐구 사이를 구별한다.
23절은 일인칭 복수에서 다시금 현재에서 십자가에 달린 자에 관한 설교를 세상의 판단에 맞세운다. 이 설교는 유대인에게 거리낌이 되고 헬라인에게 어리석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24절에 따르면 부름을 받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는 하나님의 참된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이다.
25절이 2개의 당착어법으로 십자가에서 급격한 가치전환을 근거 놓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인간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인간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
1) 18절은 17절 하반절의 표제어 십자가(staurov")를 받는다. 그리고 17절 하반 절을 짤막하게 설명하면서 원인을 나타내는 gavr를 통하여 앞에 나오는 그 구절을 부분적으로만 근거 놓는다. 그러나 여기서 gavr는 하나의 더 길고 설명하는 상론(詳論)이 시작된다는 표시이다. 즉 17절 하반 절에 나오는 말씀의 지혜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이의 대조가 우선적으로 18절에서 "십자가의 도"가 지혜의 정반대, 즉 어리석음이라는 것을 통하여 설명된다.
십자가의 도(lovgo" tou' staurou')란 십자가에 관한 말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의미한다. 십자가에 관한 말씀은 17절의 eujaggelivzesqai(복음을 전파하다)를 받기 때문에 십자가에 관한 말씀과 복음은 동일하다.
이것의 동일화는 전승에서 내려온 어떤 교리문답적인 진리라기보다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바울의 구원론적인 해석에 해당한다. 바울은 예수 죽음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13절)을 부인하지 않았으나, 그의 십자가 신학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십자가 안에서 발생한 세상 지혜의 위기와 폐기였다. 그때 십자가와 말씀의 결합이 근본적이다.
십자가에 관한 말씀(lovgo" tou' staurou')과 십자가(staurov")는 단순하게 나온 것이 아니다. 십자가는 어떤 다른 십자가가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그런데 역사적 사실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중적 의미가 있다. 먼저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에 대하여 과거의 역사적 사건으로서보다는 현재의 역사적 능력으로서 관심을 갖는다. 그러한 현재적 강력함을 십자가는 바로 말씀 안에서 얻는다. 그리고 이 말씀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다(비교. 1:23; 2:2). 그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계시로서 여기서 지금 사죄하고 심판하고, 구원하고 순종케 하면서 선포되는 복음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종말적인 행위로서 십자가의 사실성은 십자가 처형의 초상이나 순교의 보도나 수난사의 낭송을 통해서가 아니고, 더군다나 역사적 사실의 재생 혹은 비밀로 둘러싸인 상징을 통해서가 아니라, 선포되는 복음 안에서만 표현된다.
이 십자가의 복음의 영향력은 이중적이다. 그것은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나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여기서 영향을 받는 두 집단이 현재분사로 묘사된다. 이 두 용어와 두 집단 사이의 구분은 종말론적이다. 멸망과 구원은 마지막 날에 성취된다(참조. 롬 9:22; 8: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양자들, 멸망하는 자들과 구원 얻는 자들에게 이미 지금 말씀이 효력 있게 부딪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오심의 확실성에 기인하는 미래적인 의미이지만 후자는 이미 지금 구원받은 자로서 그리고 전자는 이미 지금 멸망 받은 자로서 현재 분사를 통하여 표시될 수 있다.
"멸망하는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 "어리석게" 생각되므로 이 복음을 거부한다. 그러나 "구원을 얻는 우리들"에게 그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이 대비에서 어리석음에 대응하는 말이 "참된 지혜"나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이 놀랍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바울은 우선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로 특징짓는다(24절). 그에게서 능력은 말씀과 결합된다. 말씀으로 선포되는 십자가의 복음이 구원하는 종말론적인 능력이다. 십자가 복음에 고유한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duvnami" qeou')이다. 속격 qeou'는 기원이나 종속의 속격으로서 능력은 하나님에게 속해 있음을 시사한다. 그의 구원하시고 해방하시는 영향력으로서 능력(두나미스)은 바울에게 있어서 항상 인간과 권세들의 저항에 대하여 사도의 어리석은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하나님의 표시이다.
이 능력은 영광처럼 하나님의 본질에 속한다. 신의 능력은 헬라적 개념에 의하면 개별적 기적적 행동에 나타난다. 그러나 히브리적 개념에 의하면 하나님의 능력은 역사적 구원 행위에 나타난다. 바울은 히브리적 개념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관해서 말한 것이다. 그 때 그는 예수의 부활에서 중심적인 종말적인 능력의 실증을 생각한다. 이 하나님의 능력은 죽은 자들을 살리고 비존재자들을 존재에로 부르는 그러한 창조적인 능력이다. 불신앙에서 신앙으로 전환케 되는 것도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에 의해서이다.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은 살리는 영으로서 사도의 선포 때에 작용한다. 사도가 선포하는 복음을 통해서 믿는 자들은 그것에 확고히 서 있는 한에 있어서 종말적인 구원에 참여하게 된다. 그런데 사도의 선포의 설득력은 설득하는 재능의 지혜에 있지 않다. 선포된 말씀 자체는 말씀으로만이 아니라 성령과 능력과 큰 확신으로(살전 1:5),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 십자가 복음은 예언자의 입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갖는 그러한 능력의 종말론적 농축물이다. 그 말씀은 선포한 자들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것을 관철한다(예 - 사 55:11; 비교. 롬 4:21).
2) 19절에 성경의 인용이 나온다. 바울은 그것을 셉튜아진타(70인역) 사 29:14에서 기억으로 인용했다. 그 때 바울은 kruvyw(감출 것이다)를 ajqethvsw(헛되게 할 것이다)로 대치했다. 그것을 통하여 그는 지혜를 철저하게 폐기해 버리는 하나님의 능동적 행위를 강조한다: 하나님은 이미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가 지혜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기 있는 자들의 총기를 헛되게 하리라는 것을 선포했다. 이 예언적인 선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예수의 십자가를 통하여 주권적으로 모든 인간적인 통찰을 헛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 행위를 어리석은 것으로 판단하는 모든 지혜를 멸하셨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지혜를 척도로 여기는 지혜자의 인간 중심적이고 세계 중심적인 지혜는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판결에 의하여 치유 받지 못할 정도로 깊은 상처를 받았다.
3) 20절: 성경구절의 종말론적인 실현이 개가(凱歌)로 확정되어서 수사학적 질문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이 그의 위협을 사실로 만들었다: 예언되었던 지혜의 폐기가 일어났다(구약성경 구절의 미래 시제와는 달리 20a-c절에는 현재가 20d절에는 단순과거가 나온다). 시작하는 장소 질문 부사인 pou'의 세 번 반복으로 바울은 승리를 노래하면서 이 세상 어디에서 지혜자, 율법학자와 이 세대의 변론가를 발견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세 가지 수사학적 질문을 한다. 대답은 자명하다. 그들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세 번째 질문이 속격 한정어(tou' aijw'no" touvtou) 때문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 그것은 비판되는 지혜를 "이 세대"의 지혜로 표시한다. 그때 tou' aijw'no" touvtou는 종속의 속격과 그것과 함께 주어지는 척도를 표시한다. 이 속격 한정어는 마치 20d절의 속격 한정어 tou' kovsmou가 증명하듯이 앞의 두 주어(지혜자와 율법학자)에게도 관계될 수 있다. "이 세대"는 "이 세상"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되는 묵시문학에서 나온 말로 시간적으로 제한되고 헛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대적하는 악한 세대이다.
이 세대의 지혜자, 율법학자, 변론가가 없는 이유가 이어지는 네 번째의 수사학적 질문을 통하여 제시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선지자를 통하여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만들겠다고 선언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사실로 그렇게 만드셨다. 하나님에 의하여 어리석게 된 이 세상의 지혜는 재림으로 기한이 정해진 지혜이며 독단으로 전도(顚倒)된 지혜이다. 그것은 이 세상과 그들의 반역, 그들의 시간, 그들의 본질과 결합되어 있다. 그것은 독단적인 세상의 방법과 척도에 따라 판단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행위를 정말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러한 세상의 지혜에 이스라엘의 지혜도 포함이 된다.
4) 21a절(주어: 세상)은 앞의 마지막 질문 oujciv ejmwvranen(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을 설명한다: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셨기 때문에 세상이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 그들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21b절(주어:하나님)은 앞 구절을 반제적으로 대응한다: 세상의 지혜가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다른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ejn th'/ sofiva/ tou' qeou')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우선 하나님의 지혜를 창조의 지혜로 생각할 수 있다. 유대 지혜문학에서 하나님의 지혜는 모든 것의 고안자로서 창조에 참여했다고 이해된다. 묵시문학도 창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의 계시에 관해 알고 있으나 바울에게서처럼 잘못을 확정하는 데에 사용한다. 전치사 ejn은 동사와 긴밀한 결합 속에서 이해되든지 장소적인 의미로 이해된다. ginwvskein ejn은 신약에서 종종 '무엇으로 무엇을 알다'로 사용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를 창조 작품에서 알 수 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문맥이 지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ejn은 창조의 지혜라고 해석하는 유대적 전통에 따라서 장소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의 창조활동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세상은 창조 이래로 하나님의 지혜의 한 가운데, 그것에 둘러싸여서, 그것을 깨닫지 못한 체로 존재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지혜를 지혜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로운 계획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문맥에 의하면 21a의 주어(세상)와 21b의 주어(하나님)가 맞서있고 심판의 문맥에 따라 다음이 시사된다: 하나님은 창조주에 대한 인간의 반역에 대하여 새로운 길을 열어놓으셨다. 세상은 그 자신의 지혜를 이용하고 그들 자신의 척도와 범주를 유효하게 만들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를 이해하는 가능성을 상실했다. 이것은 자신의 의로 하나님의 의를 그르친 자들의 태도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그들의 지혜로 끝장났고 목표에 도달할 수 없는 곳에서 심판으로만 반응하거나 세상을 내버려두지 않고 과격한 새로운 시작을 마련하시고 어떤 세상의 지혜로 근거 놓을 수 없는 구원을 십자가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가져오도록 결정하셨다. 그것으로 세상의 지혜에 계속적인 희망과 발전은 없다.
이 구절에서 모든 강조점은 "하나님이 기뻐하셨다"에 놓여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십자가를 내용으로 갖기 때문에 그것은 모든 인간적인 논리와 종교적인 기대에 상반된다. 십자가에 의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는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사실로 어리석음과 약함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구원을 이색적인 지혜나 환상적인 봄이나 제의적인 실습을 통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설교를 통해서 이루어지도록 결정했다. 이 방법은 사실로 선포의 내용만큼이나 어리석다. 하나님은 이 방법을 통하여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다.
믿는 자들은 멸망하는 자들과는 달리 이 어리석음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제공된 구원을 인정한다. 여기서 믿음은 어리석음이 간단하게 지혜로 바뀌고 모든 비밀과 수수께끼가 예수의 죽음의 구원론적 해석을 통하여 풀리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다. 믿음은 앎과 이해를 포함한다. 그러나 우선 십자가 복음에 대한 영접이고 거기에 확고히 붙어있는 것이다.
5) 22절은 선포에 대면해 있는 세상의 판단을 소급해서 그것의 근거를 설명하고 그것을 현재에서 확장한다. 이 때 우선 유대인과 헬라인의 판단 사이가 차별화된다. 유대인과 헬라인이 세상의 대표자로서 나타난다. 바울은 이들을 통하여 십자가에 대한 눈멂과 반대를 구체화한다. 표적 구함과 지혜 요구는 참된 하나님 인식을 막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표적과 지혜를 인식의 근거와 증명으로서 거부하시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표적 요구는 인간 척도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거절하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은 사람들을 향한 자신의 주장과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능력을 입증할 수 있는 가시적인 행동양식으로 신빙성을 확보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적 인간으로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스스로 능력 있는 비판자와 전문가로 자처한 셈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설명할 책임이 있는 것처럼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을 자신들의 계산으로 용납할 수 있는 것처럼,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에 대한 선포를 자신의 판단과 기대의 장으로 가져온다. 그러나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게 어떤 증명도 요구 할 수 없다.
이 인간 중심적인 척도가 유대인을 헬라인과 결합시키는 것이다. 헬라인은 지혜를 추구한다. 그들은 지혜에 대한 노력으로 안전판을 삼고 자신의 지혜를 척도와 정당성의 범주로 삼는다. 여기서 sofiva(지혜)는 주어 JEllhne"(헬라인)와 동사 zhtei'n(구하다)에 의하여 강력한 이성적인 강조를 갖고 헬라의 갖고 헬라의 종교적 세계관의 사변적인 노력을 의미한다. 그들은 이성의 도움으로 종교적 세계 의미를 제것으로 삼고 신적인 것을 통찰과 동일시한다. 지혜를 추구하는 그리스인들은 자신의 지혜로 증명할 수 없고 세상의 범주로 포박될 수 없는 복음의 선포를 거부한다.
6) 23절: 복음의 선포는 그러한 인간 중심적인 기대에 부응하거나 적응할 수 없다. 이 구절은 21b에서 묘사한 내용에 상응한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자로서 그리스도를 전한다. 선포의 유일한 내용과 구원의 배타적인 근거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이다. ejstaurwmevno"(십자가에 달린)가 결과적인 기능을 갖는 현재완료분사이어서 십자가에 못 박힘을 과거로 제껴버리지 않는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분명히 지속적으로 십자가의 표시를 짊어진 자는 동시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분이라고 할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더 놀랍고 광범위한 의미는 그것의 역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하나님에 의하여 부활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힌 자로 머문다. 십자가에 관한 말씀은 과거의 단순한 사실이나 부활절을 통하여 추월된 통과 단계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자를 현재적 그리스도로 선포한다.
이 십자가 설교, 즉 이 세상에서 승귀한 자의 현존 방식으로서 그리고 기독론의 지평으로서 십자가에 달리심은 모든 다른 종교와 신학의 깨어남과 비판이다. 그것이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다. 여기서 여격 jIoudaivoi"(유대인)는 십자가 설교의 청중을 거의 표시하지 않고 내용적으로 선포하다를 직접 지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구조는 헐렁하여 18절에 있는 것처럼 이해될 수 있다. 즉 바울이 그리스도를 유대인에게 경악스러운 거리낌으로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자가 그들에게 그러한 것을 의미하고 그러한 분으로 된다. Skavndalon은 원래 걸려 넘어지는 것이다. 특히 함정의 설치나무, 함정과 덫이고, 그래서 유혹하여 파멸시키는 것이다.
십자가 설교가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다. 이방인은 헬라인과 동의어로 쓰였다. 십자가 처형이 노예나 범죄자 형벌에 해당하기 때문에 십자가는 "가장 수치스러운 형벌"이고 "평판이 나쁜 말뚝"이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판결을 받고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의 아들은 이성적인 헬라인들에게는 분명히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일이다.
7) 24절 부름을 받은 자들은 21절의 믿는 자들과 동일하다. 그들에게,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는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이다. 이 부름이, 인격적인 결단, 발전, 경험이 아니라, 우선적인 것이고 하나님의 구원사적인 주도권을 유대 기독인과 이방 기독인에게 불쾌와 어리석음의 극복에로 확장한다.
능력과 지혜는 술어적이 아니라 동격으로 이해된다. Duvnami"(능력)는 22절의 shmei'a(표적)와 상응하고 sofiva(지혜)는 22절과의 관계한다. 능력의 전치(前置)는 18절에 상응한다. Cristov"는 부활하신 분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힌 자를 의미한다. 여기서 바울은 십자가에 달린 자로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와 동일시한다. 십자가에 달린 자가 부활하신 자와 다르지 않고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자에게서 나타났다. 역설적인 첨예화가 십자가에 달리신 자에게서 관철된다.
바울에 의하면 고린도 교인들에 의해서 그렇게 높이 평가되었던 지혜가 십자가의 복음을 통하여 비판적으로 처치(處置)된 후에 십자가에 달린 자가 이제 하나님의 지혜와 동일시 될 수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의 실증을 위한 모범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정말로 구체화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만이 구원하는 하나님의 지혜이라면 다른 모든 지혜(유대의 선재적인 지혜형태)는 배제된다. 속격 ejn qeou가 강조되어서 앞에 우연히 서있는 것이 아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만이 있다. 하나님이 불의한 자들에게 의를 말씀하심을 통하여 자신의 의를 들어내셔서 인간의 모든 의를 배제한 것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지혜로도 그렇게 하셨다. 그러한 방법으로 지혜가 지혜로 공격당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뜻을 찾되 사실적인 깊이에서, 즉 하나님이 유일하게 그리고 실제로 찾게 한 곳, 십자가에서 찾지 않는 영광의 신학의 자기 영광적인 지혜가 공격당한 것이다.
8) 25절은 여기서 종말론적으로 수행된 모든 가치의 전도를 근거 놓으면서 하나님은 아주 인간과는 다르다고 설명한다. 이 구절은 어떻게 어리석음이 지혜이고 약함이 강함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어느 정도 격언적으로 대답한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인간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인간보다 더 강하다. 추상명사 대신에 중성 단수, 즉 toV mwrovn(어리석음)과 toV ajsqenev"(약함)를 사용한 것은 구체적이고 정해진 경우, 즉 십자가의 행위를 시사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각과 행위가 사실적인 강함과 지혜의 측면에서 십자가의 행위와 비교되어져야만 한다. 십자가는 사실로 어리석고 약하다. 하나님이 어리석음과 약함의 방법으로 스스로 계시하신 곳에서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인간 구원의 능력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함이 인간보다 강하고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인간보다 더 지혜롭다. 그는, 그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탁월한 분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어리석음과 약함에로 자신을 편입시켜서 십자가 안에 있는 존재의 깊이에로의 길을 함께 가셨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 넘는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든 약한 것과 어리석은 것과, 고통 가득한 것과 죽는 것 위에 계시는 숭고한 분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어리석음과 약함으로서의 표시가 이 세상의 좌표계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십자가상에서의 하나님의 행위는 실제로 어리석고 약한 것으로 여겨져야만 한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 그 자체가 약하고 어리석은 - 어리석은 자들과 약한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어리석음과 약함에 참여하신 것이다. 이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로는 상상할 수도 없으며 인간의 능력으로는 이룰 수도 없는 것을 성취하셨다.
본문(1:18-25)에서 바울은 교회분열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자기 신학의 중심인 십자가 신학을 전개한다. 그에 의하면 십자가는 우선 종교적 인간의 자기 중심적이며 자기 확신적인 모든 세상 지혜의 위기와 파멸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예수의 십자가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모든 인간적인 통찰을 헛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 행위를 어리석은 것으로 판단하는 모든 지혜를 멸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자체가 어리석고 약한 십자가에서 어리석은 자들과 약한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어리석음과 약함에로 자신을 일치시키셨다. 이것은 인간의 지혜로는 상상할 수도 없으며 인간의 능력으로는 이룰 수도 없는 것이다. 이 십자가는 지혜와 강함을 판단의 기준과 척도로 삼는 세상에 철저히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인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 세상의 지혜는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를 전혀 알 수 없다. 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주도에 의해 발생한 전적으로 새로운 종말론적인 계시 사건이다. 하나님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만 자신을 완전하게 계시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인간을 판단하시고 구원하시며 은혜를 베푸시고 심판하신다.
하나님은 인간 구원을 위한 계시의 통로로서 어리석고 약한 십자가를 택하셨을 뿐만 아니라, 구원의 길로서 어리석은 방법인 '십자가에 관한 설교'를 택하셨다. 하나님의 계시인 십자가는 하나님의 의사가 전달되는 과정에서 전도의 형태를 띄고 말씀과 결합되어 '십자가의 복음'으로 선포된다. 이 설교는 죄인을 욕보이는 십자가에 달린 자를 내용으로 갖는다. 그래서 구원 기대에 대한 모든 인간적 논리와 모든 판단범주를 파괴해 버린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과거의 역사적 사건이라기보다는 현재의 역사적 능력이다. 둘째로 십자가는 그러한 현재적인 능력을 바로 말씀 안에서 얻는다. 이 말씀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다. 이 말씀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계시로서 여기서 지금 사죄하고 심판하고, 구원하고 순종케 하면서 선포되는 복음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종말적인 구원 행위로서 십자가의 현실성은 역사적 사실의 재생이나 비밀로 둘러싸인 상징을 통해서가 아니라, 선포되는 복음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이 십자가의 복음의 영향력은 이중적이다. 그것은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나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에 대하여 선포한 말씀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의 구원하시는 영향력으로서 항상 인간과 권세들의 저항에 대하여 선포된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하나님의 표시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동시에 죽은 자들을 살리고 비존재자들을 존재에로 부르며 비신앙인을 신앙인으로 변화시키는 그러한 창조적인 능력이다.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은 살리는 영으로서 말씀 선포에 작용한다. 인간이 선포된 십자가에 관한 말씀에 의하여 설득되고 압도당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기적은 일어나고 모든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작용한다. 이 능력을 맛보고 지혜에 설득되어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은 그것에 확고히 서있는 한에 있어서 종말적인 구원에 참여하게 된다. 그런데 십자가 설교의 설득력은 설득하는 재능이나 수사학적인 기교나 합리적인 수단에 있지 않다. 그 설득력은 선포된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진리로 증명되어야만 효력을 갖게 된다. 십자가 복음의 진리 증명은 하나님 자신, 그의 성령과 그의 능력만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 성령은 작위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
부르심을 받고 구원을 얻는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자로서 그리스도를 전한다. 선포의 유일한 내용과 구원의 배타적인 근거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분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힌 자이다. 그는 하나님에 의하여 부활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못 박힌 자로 머문다. 십자가에 달린 자가 부활하신 자와 다르지 않고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자에게서 나타났다. 역설적인 첨예화가 십자가에 달리신 자에게서 관철된다. 십자가에 달린 바로 그가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이다. 십자가의 복음은 과거의 단순한 사실이나 부활절을 통하여 추월된 단계가 아니라 부활하셔서 승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달린 자를 현재적인 그리스도로 선포한다. 선포된 말씀 자체는 성령과 능력과 큰 확신으로,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 말씀으로 선포되는 십자가의 복음이 구원하는 종말론적인 능력이 된다.
말씀 선포자나 전도자나 교사는 십자가 복음의 사람이다. 그는 영광의 신학의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 신학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1. 말씀 선포자나 전도자나 교사는 철두철미하게 십자가에 일치하는 십자가 복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선 내가 선포된 십자가에 관한 말씀에 의하여 설득되고 압도당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았는지, 그리고 받아들인 복음에 확고히 서서 그 복음을 선포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가 되고 있는지 깊이 살펴보아야 한다.
2. 말씀 선포자나 전도자나 교사는 판단하고 결단하고 행동해야 할 모든 것을 인간 중심적이며 자기 확신적인 세상의 지혜나, 세상의 기준이나 판단범주에 따르지 말고 '말씀으로 선포되고 부활하시어서 영으로 현재가 되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하나님의 기준과 뜻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
3. 말씀 선포자나 전도자나 교사는 거의 모두가 어리석고 약한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여서 어리석고 약하고 비천한 가운데서 존엄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 사실에 대하여 우리는 언제나 구원받은 것에 대한 깊은 감격과 감사가 있어야 한다. 그 자체가 어리석음과 약함인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거기에 참여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동시에 실제로 사회에서 어리석고 약하고 비천한 자들에 대한 깊은 형제애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은 지혜와 강함에 자신을 일치시키신 것이 아니라 어리석음과 약함에 자신을 일치시키셨기 때문이다.
4. 말씀 선포자나 전도자나 교사는 십자가의 복음을 중점적으로 전해야 한다. 이 복음을 전할 때 세상의 기준에 따르는 수사학적인 기교에 의지하지 말고 성령의 능력에만 의지하여 약함과 두려움과 떨림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리하여 십자가의 달린 그리스도와 십자가 복음의 능력이 우리들 가운데 역사하게 해야 한다.
5. 말씀 선포자나 전도자나 교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깊은 뜻을 찾되 언제나 사실적인 깊이에서, 즉 하나님이 유일하게 그리고 실제로 찾게 한 곳, 부활하신 분이 달려 있는 현재적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찾게 해야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다른 곳에서 찾는 자기 영광적인 지혜를 미련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6. 십자가의 복음의 상황적 자리는 무엇보다도 교회의 분열이다. 기독교인들이 분열하고 있는 것은 십자가의 복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서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서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 그들은 십자가의 복음을 중심으로 교회와 교단과 교파의 모든 분열을 극복해야 한다. 분열과 분쟁과 시기가 있는 것은 아직도 그러한 기독교인이 십자가의 복음을 잘 모르는 미숙한 그리고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이다. 성숙한,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이루어 간다. 분열이 극심한 현대 한국 기독교계에서 우리는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교회의 일치를 이루어 가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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