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종교론
랍비 시대(1~18세기)
탄나임 시대
기원 전후에 활약한 힐렐과 샴마이 때부터 200년경 미슈나 편찬 때까지를 탄나임 시대라 한다. 70년 야브네에서 유대교가 재건되었으나 제2차 유대 독립전쟁 때야브네 주변이 몹시 위태로워진 까닭에 최고의회는 갈릴리 우샤, 베트 셰아림, 세포리스, 티베리아스로 전전했다. 성전과 제사 대신 성서와 기도 중심의 유대교가 야브네와 갈릴리에서 확립되었다. 갈릴리에서 초창기에 최고의회를 주재한 이들은 시메온 벤 가말리엘(135경~175경 재직)과 그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유다 하 나시(175경~220 재직)였다. 유다는 그때까지 구전으로 전해오던 율법을 집대성하여 200년경 우샤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율법집을 펴냈으며 이것이 미슈나이다. 미슈나에는 잡다한 율법들이 6부 63장으로 분류되었다. 이어서 미슈나에 빠진 전승들을 모아 율법집, 즉 토세프타를 펴냈다. 탄나임 시대에 모세5경 주석서들도 편찬되었는데, 〈출애굽기〉 주석서 메킬타, 〈레위기〉 주석서 시프라, 〈민수기〉·〈신명기〉 주석서 시프레, 〈민수기〉 소주석서 시프레 주타, 〈신명기〉 주석서 미드라시 탄나임 등이 있다.
아모라임 시대
200년경 율법집 미슈나가 편찬됨과 아울러 그 율법집을 풀이하는 아모라임(해석자들) 시대가 시작된다. 아모라임의 율법해석을 집대성한 문헌이 〈탈무드〉인데, 2가지 종류로 대별된다. 첫번째는 팔레스타인 탈무드, 일명 예루살렘 탈무드인데, 이것은 팔레스타인에 있는 카이사리아 학파와 세포리스 학파의 해석을 모아 5세기초에 편찬한 것으로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씌어졌다. 2번째는 바빌로니아 탈무드인데 메소포타미아에 이민 가서 살던 유대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주로 네하르데아·품베디타·수라 학파의 해석을 모아 7세기초에 편찬되었다.
640경~1038년 바빌로니아 학파가 지중해 이슬람 지배권 영역에서 득세하여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통용되던 시대를 일컬어 게오님(geonim 尊者) 시대라 한다. 바빌로니아 학파 게오님의 영향으로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모든 유대 공동체에 통용되는 보편적 율법집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반기를 든 운동도 있었다. 8세기에 아난 벤 다비드가 일으킨 카라이트(히브리어로는 카라임) 운동이 대표적이다. 이 운동은 다음과 같은 3가지 기치를 내세웠다. ① 성서 중심주의에 의하면 랍비들의 율법은 인위적 계율이다. ② 메시아의 구원을 재촉하고자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자. ③ 성서를 재검토하여 율법과 교리의 진수를 찾아내야 한다. 9세기에 이르러 카라이트 운동은 팔레스타인뿐 아니라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유대 공동체에까지 전파되었다.
중세 유럽 유대교
950~1750년의 중세 유럽 유대교는 그리스도교 지배하의 프랑스·독일에 자리잡은 아슈케나짐과 이슬람교 지배하의 남부 스페인에 자리잡은 세파르딤으로 양분된다. 이슬람이 지배하는 스페인에 살던 유대인들, 곧 세파르딤은 이슬람의 정치·경제·문화·사회에 융화되어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매우 폭넓은 저술들을 남겼다. 가장 출중한 석학으로는 마이모니데스, 일명 모세스 벤 마이몬(1135~1204)을 꼽을 수 있다. 그는 남부 스페인 코르도바에서 태어나 한동안 카이로 이집트 궁정에서 활약하다가 이집트 혹은 이스라엘에서 죽어 티베리아스에 묻혔다. 그는 중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따라 유대교를 이해했다. 율법에 관한 저술들로는 미슈나 주석서, 〈세페르 하 미츠보트 Sefer ha-mitzwot〉(613개조 명령과 금령), 〈미슈네 토라 Mishne Torah〉(율법 전집 14권)가 있다. 1492년에는 스페인에서, 1497, 1506년 포르투갈에서 유대인들이 각각 추방됨으로써 이 지역의 유대교는 붕괴되었다.
그리스도교가 지배하던 프랑스와 독일에 살던 유대인들, 곧 아슈케나짐은 도시 중심부에 자기네끼리만 모여 살면서 상업에 종사했다. 상거래가 아니면 그리스도교도들과 상종하지 않고 게토 안에서 자기네 방식대로 살았다. 제2차 십자군원정(1147~49) 이후에 독일 유대계에서는 신비주의자들(하시딤)이 많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고행·순교·속죄 행위 등을 강조했다. 아슈케나짐의 최대 석학은 독일 마인츠와 보름스에서 수학하고 프랑스 트루아에서 가르친 랍비 솔로몬 벤 이삭(약칭은 라슈)으로서 그의 성서 주석과 바빌로니아 〈탈무드〉 주석은 너무도 뛰어나서 성서와 바빌로니아 〈탈무드〉 모든 판본에 함께 수록되기에 이르렀다.
13세기에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역에서 카발라(전통)라는 신비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카발라의 대표적 경전은 〈조하르 Zohar〉(광채)이다. 〈조하르〉 가운데서 오래된 부분은 모세스 벤 ? 톱 디 레온(1305 죽음)이 쓴 것이다. 16세기에 이르러 카발라 신비주의자들은 티베리아스에서 북쪽으로 35㎞ 떨어진 제파트로 몰려들어 제파트를 카발라 성지로 만들었다. 여기서 돋보이는 신비주의자로는 이사크 루리아(1531~1573)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이스라엘이 겪는 여러 가지 환난은 신성(神性)의 생기가 억눌린 것을 반영한다고 보고, 신성의 생기를 해방하는 신비신학을 주창했다. 카발라 운동의 가장 극적인 사건은 샤베타이 체비(1626~76)의 출현이었다. 그는 투르크의 스미르나에서 태어나 하느님의 존함 '야훼'를 발성하는 등 괴상한 짓을 하더니, 1665년 4~5월 이스라엘 가자에 가서 카발라 신비주의자 나단 벤 엘리샤를 만나고 메시아로 행세하기 시작했다. 신비주의자 나단에게 설득되어 1665년 5월 31일 가자에서 자신이 메시아라고 선포하여 큰 소동을 일으켰다. 9월 초순 스미르나로 돌아와서는 몇 달 동안 비교적 조용히 지냈으나 12월 11일 자신이 메시아라고 재차 선포함과 아울러 1666년 6월 8일에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노라고 장담했다. 1666년 2월 6일 이스탄불로 가려고 마르마라 내해(內海)를 항해하던 중에 오스만 투르크 관헌에게 붙잡혔다. 그는 사형을 받든지 이슬람교로 개종하든지 양자 택일을 하라는 강요를 받고 9월 15일 에디르네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한동안 황실 은급을 받으며 비교적 자유롭게 살았다. 그러나 이중 신앙생활(카발라 메시아니즘과 이슬람교)을 한다는 죄목과 방종한 성생활을 한다는 죄목으로 1672년 8월 이스탄불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이듬해 1월 알바니아 둘치뇨로 유배되어 1676년 9월 17일 속죄일에 갑자기 죽었다. 그의 후견자 나단은 그가 체포된 것, 이슬람교로 개종한 것, 유배가서 죽은 것을 모두 신학적으로 설명한답시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이것은 신비주의와 메시아니즘의 허구성이 생생히 드러나는 사건임에 틀림없다.
현대 유대교(1750~)
18세기에 이르러 독일에 살던 유대인들 중에서 은행가와 공장주 등으로 성공한 이들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주변 사회와 접촉이 잦게 되었다. 그결과 멘델스존(1729~86) 같은 계몽철학자가 나타났다. 그는 조상 전래의 유대교 신앙과 서구 계몽사상의 융합을 시도했다. 18~19세기에 독일에서는 유대교를 당시 사회와 사조에 적응시키려는 개혁운동이 계속되었다. 1840년대에 이르러 독일 유대인들이 대거 미국으로 이주하여 기존 미국 유대교 개혁자들과 합세함으로써, 1880년 미국 유대교 200개 회당 거의 전부가 개혁 유대교로 기울어졌다.
그렇지만 서유럽의 유대인들 대다수는 조상 전래의 유대교를 돈독히 지키면서 아울러 문화적으로는 현대사회에 적응하는 신보수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동유럽에서는 18세기에 하시딤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카발라 운동을 대중에게 확산시킨 것이다. 하시딤 운동은 철저히 카리스마적 지도자(rebbe)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지도자끼리 다투는 일이 잦았다. 처음에는 지도자가 민주적으로 선출되었으나 나중에는 세습되었다. 예루살렘의 하시딤은 메아셰아림 지구에 모여 산다. 19세기 말엽에는 시온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오스트리아 태생 유대인 작가 테오도어>헤르츨(1860~ 1964)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들의 국가를 세운다는 기치 아래 1897년 바젤에서 제1차 시온주의 세계대회를 열었다.
1917년 11월 2일 영국 외무장관 A. J. 밸푸어는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자신들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에 찬동한다고 선언했다. 1918년 영국군은 독일과 동맹을 맺은 터키군을 팔레스타인에서 몰아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초에 서구의 유대인들이 히틀러의 박해를 피하여 팔레스타인으로 대거 이주함으로써 유대인들과 아랍 원주민들 간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947년 11월 29일 국제연합이 이스라엘 독립을 승인한 데 이어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은 독립을 선포했다. 그결과 이스라엘은 주변 아랍국들과 여러 차례 전쟁을 치렀다. 이스라엘 독립전쟁(1948~49), 시나이 전쟁(1956), 6일전쟁(1967), 속죄일 전쟁(1973), 이스라엘군의 레바논 침공(1982), 아랍인 봉기(인티파다, 1987~) 등 분쟁의 연속이었다.
마지막으로 유대교의 예수관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야브네 시대(70~135) 이래 유대인들은 예수를 민족 배반자, 종교 배신자로 배척했다. 그러다가 19세기 중엽 독일에서 유대교 개혁운동이 일어나면서 예수와 그리스도교도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히브리대학교 교수이며 시온주의자였던 J. 클라우스너(1874~1958)는 예수를 위대한 윤리 스승이라고 했다. 영국에서 유대교 개혁운동을 일으키고, 시온주의와 밸푸어 선언을 반대한 C. J.G. 몬테피오레(1858~1938)는 예수를 새로운 모습의 예언자라 했다. 독일의 진보적 랍비 레오 베크(1873~1956)는 예수를 일컬어 유대교의 순수하고 선한 요소를 체현한 사람이라고 했다. 미국의 보수적 랍비 밀턴 스타인벡(1903~50)은 예수를 인간에 대한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매우 아름답고 고귀한 정신이라고 했다. 비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시온주의를 제창한 마틴 부버(1878 ~1965)는 예수를 대형(大兄)이라고 했다. 한편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1965년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 중 유대인들에 관한 항목에서 유대인들과 그리스도교도들 간의 친교를 권하고 성서와 신학 공동 연구를 격려했다. 이처럼 20세기에 이르러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관계가 조금 개선되었지만 아직은 시작에 불과하다.
鄭良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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