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도 모르게 다른 복음을 좇을 위험성
강의 목표
열왕기상 12:25-33
갈라디아서 1:6-8
고린도후서 11:14-15
이곳에서는 통상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라고 말할 때, 사실상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보다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서 연구하도록 한다. 구원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에는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도 없이, 혹은 잘못 알고 있는 가운데 자신의 구원을 확증하려는 이들이 발견되곤 한다. 구원은 마음의 심리적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명백한 일하심으로서의 구속사이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구원인 것이요, 그래서 복음은 진리로써 증거되고 또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으로서의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여야 한다. 어중간하게 알고 있는 가운데 비슷하고 유사하게 아는 복음적 지식으로는 자칫 잘못 다른 복음을 좇을 위험성에나 놓이게 된다. 이 사실을 크게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자기가 믿고 있는 복된 가치성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다른 복음이 미혹해 올 때 쉽게 넘어지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그 미혹케 하는 것이 더 매력적으로 보여질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그렇게 생각이 들면 여지없이 그 거짓된 것을 좇기 마련이다.
이처럼 복음적 지식을 대충 대충 아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결과를 자신에게 초래시키게 될 것이요, 나아가 자신을 주목하게 되는 다른 사람을 그런 식으로 그릇된 길로 유도하는 잘못까지도 범하게 되는 위험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중간한 진리는 위험한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은 물론이요 나아가 타인까지도 어두움 속으로 빠트릴 수 있는 무서운 함정인 것이다.
들어가는 말
어중간한 진리는 거짓보다 더 위험한 것이다라는 말이 가장 잘 통하는 세계가 있다면 바로 기독교인의 세계일 것이다. 실제로 우리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구속의 진리를 앎에 있어서 대충 대충 안다거나 또한 막연하게 아는 정도밖에 되지 아니하면서도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듯이 생각하는 중에 엄청난 모순에 빠져드는 사람들이 제법 많이 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유대인들은 아무 것도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엄청난 죄를 범하게 되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생각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의 행동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판단하였고 끝내는 사형에로 몰아갔던 것이다.
저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어떠 어떠한 일을 하실 것인가에 대해서 나름대로 알고 있었다. 만일 저들이 이런 것들을 전혀 몰랐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당시 예수께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저들과 논쟁하는데 소비하셨는가를 생각해 보면 놀라울 정도이다. 예수님의 행동은 그들이 알고 있었으며 추종하고 있었던 것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오늘날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늘날의 기독교가 결정적으로 위협을 받는 것은 불신앙인들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나름대로 정당하고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자칭 기독교인들로 말미암아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런 이들이 권세를 잡는 가운데 큰 제도권을 형성하게 하고 있을 경우에 있어서는 문제는 더더욱 심각해지는 것이다.
저들은 자기들이 복음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가운데 정작 참된 복음의 길을 걷는 사람들을 모진 박해 속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동시에 그 거짓된 것을 마치 진리인양 오도시키면서 놀라웁게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크게 하고 있다고 여긴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제일 큰 박해를 받았던 상대는 하나님을 전혀 몰랐던 이방인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매우 모순되게도 하나님을 안다고 자처하였던 유대인에 의한 것이었다. 저들은 부분적으로 알고 있었으며 대충 알고 있었던 그 짧은 진리로써 바울을 거짓 일군으로 몰아갔다. 그들이 보기에 바울은 하나님의 율법을 폐하는 전대미문의 협작꾼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저들 유대인들이 진리의 복음의 길에 큰 거침들이 된다고 보았다. 그들이 전하는 진리란 부분적으로만 옳을 뿐이고 전체적인 차원에서 평가될 때에는 다른 복음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 결과를 낳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바울 사도가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까지 말해야 했던 필연성과 정당성은 이에 있는 것이다.
주제연구
1. 바르게 알지 못하면 시험의 때에 배도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자신들의 구원받은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고 충분하게 이해하는 일일 것이다. 이것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사람은 시험의 순간이 이르게 되면 일순간에 복음을 저버리고 다른 길로 접어들게 될 것이다. 갈라디아 교회의 어리석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신 이를 떠나고야 말았던 이유가 이에 있었다.
(1) 그리스도인임을 자처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의 온전한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음을 본다. 왜냐하면 어느 순간에 이르게 되어 하나님을 쉽게 떠나 버린다거나 혹은 그 분께 드리는 순종의 삶을 온전히 수행하지 아니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그러나 이것은 그가 아예 처음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되어지는 현상인 것이다. 왜냐하면 은혜의 은혜됨을 바르게 이해한 사람으로서 그처럼 복음에서 떠날 수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① 대충 알고 적당히 있으면서도,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배우기를 원치 않는 가운데 엉뚱한 사고를 내는 일이 종종있다.
② 이지적이지 못하여 매사에 쉽게 흥분하고 즉흥적으로 결정하는 바 순전히 감정적인 사람들에 위해서 하나님의 복음이 담고 있는 진리의 진리됨은 그 충만한 빛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③ 오늘날 부끄럽게도 우리 중에 복음을 심리학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팽배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큰 위기이다. 복음을 분위기와 감점의 차원에서 이해해서는 안된다.
(2) 먼저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복음의 의미에 대해서 간략히 점검해 보도록 하자. 실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을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이 비천한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신 중에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빌 2:6-11을 보라.
①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이 땅에 오시사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셔서 성육신하셨다.
② 그러나 매우 모순되게도 자기 백성들로부터 극심한 배척을 받으시는 고난의 생애를 사셨다.
③ 갖가지 박해와 핍박 속에서도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시는 사역을 감당하시는 가운데 끝내는 십자가에 달리셨다.
④ 그리하여 처참한 고통을 맛보시면서 죽어야 할 이유가 없는 분으로서, 그처럼 죽음을 맛보신 가운데 무덤에 장사되셨다.
⑤ 그러나 성령님의 능력 안에서 사흘만에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당당히 부활 하셨으며 40일동안 계시면서 친히 그 사실을 증거하셨다.
⑥ 그리고는 승천하신 가운데 당당히 아버지께로 돌아가셨으며 그분의 우편 보좌에 앉으셨다.
⑦ 그리하여 지상에서 성취하신 구속사역에 근거하여 세상에 성령님을 보내시며 그리하여 당신의 자녀들을 돌보신다.
(3) 복음을 안다고 할 때 이상의 사실을 보다 진지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머물지 말아야 한다. 계속해서 그와 같은 구속의 일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권적으로 주도하신 것이라는 사실 또한 철저히 기억되어야 한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처럼 순종하신 사실 못지 않게 또한 성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사건을 준비하시고 또한 최종적으로 완성하신 사실을 깨닫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구속사에 있어서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주관하시는 것이다.
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구속해 주시기 위하여 화목제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셨다. 즉 구속사역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치밀하신 계획안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롬 3:25를 보라.
②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말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사랑으로써 찾아오셨던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요일4:10을 보라.
③ 바로 이사실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자비의 뛰어난 특성에 잘 드러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심에 있어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그 어떤 댓가와 공포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은혜를 베푸신다. 시55:1을 보라.
(4)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고차원적인 은혜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도록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이었다. 복음이 자체에 내포하고 있는 이러한 특성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각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구원의 정교함을 제대로 인식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① 구원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창세전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구속사를 작정하시고 예정하신 가운데 또한 성취하셨다. 진실로 구속사는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한 일이 아니다. 철두철미 하나님의 계획에 의거한 것이다. 엡 1:3-6을 보라.
② 이 사실을 계시하시는 충분한 계시의 기간을 가지셨다. 구약의 역사가 이런 의미를 가진다. 구약의 율법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게 될 참 믿음의 길을 예시하고 가르치는 역할을 하였다. 갈3:23-24를 보라.
③ 드디어 때가 차매 온전히 성취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저가 오셔서 이루신 사역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속량되었고, 또한 아들의 명분이 얻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갈4:4-7을 보라.
④ 하늘로 승천하신 가운데 당신께서 성취하신 구속의 효과를 구체적으로 자기 백성에게 적용시키신다. 이 일을 위하여 믿는 자들에게 임하시는 성령님의 내주하심이 진행되고 있다. 요 14:16-17을 보라.
⑤ 이리하여 성령께서는 믿는 자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사역에로 효과적으로 연결되게 하는 구원의 보증의 영이 되신다. 즉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신다. 엡 1:13-14를 보라.
n 구원의 보증이다. 고후1:22/5:5를 보라.
n 부활의 보증이다. 롬 8:9-11을 보라.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은 이제 하나님을 떠났다. 몰론 이 말은 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공개적으로 부인하고 다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아니할 것이다. 왜곡된 진리를 따르고 그 안에 속해 있었음을 인하여 결론적인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저희를 부르신 하나님을 떠났던 것이었다. 어찌되었든지 결론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을 떠나버렸다.
(1)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는 저희가 그리스도를 떠나긴 떠나되 천천히 그랬던 것이 아니라 매우 신속하게 빨리 떠났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처음에 예수님을 잘 믿는 것 같았는데, 그러나 이내 신앙을 저버려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 법이다. 실제로 바울을 그렇게도 따랐던 데마가 그리 같지 아니한 시간 안에 세상으로 가버렸던 사건이 있었다. 딤후4:10을 보라.
① 믿는 바의 도리가 의미하는 복음의 진수를 진지하게 살펴보는 과정을 가져보지도 아니한 가운데, 성급한 결심으로 복음을 받아들인다고 작정한 사람들의 경우에서 이러한 일은 쉽게 나타난다.
② 이 사람은 자기가 그처럼 복음을 받아들인다고 하는 사실이 의미하고 있는 진정한 가치를 미처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시험을 대면하여 복음을 저버리는 불행에로 돌아서는 것이다.
③ 평온할 때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때에 유지하고 있는 자신의 믿음은 그것을 시험할 창수가 일어날 경우 단번에 그 진위성이 드러나게 될 것인데, 이때 복음을 저버리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당시까지 자신이 알고 있었던 진리가 전체적인 것이 아니요 부분적인 것이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2) 떠나거나 배도하는 이유는 세상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데마의 경우가 그러하였다. 저는 여전히 세상을 사랑함으로 인하여 결국에는 복음을 떠났다. 사실 복음과 세상은 상호 대치된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곳에 복음은 거할 자리를 찾지 못하게 된다. 즉 이 말은 복음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복음의 복음됨이 가져다주는 충만한 가치와 만족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①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임을 알아야 한다.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다. 복음의 충만한 맛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만이 더불어 세상까지도 붙잡아 보겠다는 식의 이중적인 혐오스러운 마음을 가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스스로 하나님의 원수됨을 자초하는 데로 나아가는 것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 약 4:4를 보라.
② 복음을 받아들였노라 하면서도,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잇는 사람은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단순히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차원에서 생각되어질 일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권세를 잡은 자인 사단을 추종하는 차원에로까지 나아가는 것이며, 그 사실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인 것이다. 오일 2:15-16을 보라.
③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것의 위험성을 염려하시는 가운데 이 문제에 재해서 친히 언급하셨다. 그 분께서는 세상을 사랑하는 가운데 동시에 하나님 역시 그렇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셨다.
n 마6:24를 보라.
n 행 20:35를 보라.
n 딤전 6:3, 6-10을 보라.
n 잠11:24-25, 30:9를 보라.
④ 물질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하나님의 사랑이어서는 안도고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구원 그 자체를 즐거워 할 수 있어야 한다. 합 3:17-18을 보라.
(3) 환상적 축복론에 의해 부추겨진 신앙은 사실상 구원얻는 신앙이 되지 않는다. 그런 이들은 불이익적 고난이 올 경우 즉시로 배도하기 마련이다. 이런 이들은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이러한 사람은 복음적 진리를 순종함에 있어서 더 이상 견디기 어렵다고 판단되는 나름대로의 적절한 기회들이 이르게 되면, 그 때에는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이 세상으로 돌아가고야 말 것이다. 몰론 복음을 떠나는 일이 순전히 자신의 내적인 동기만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외부적인 유혹과 관련하여 복음을 떠나게 되는 일도 있다. 이때에는 통상 떠나게 되는 동기가 두 가지의 경우로 압축된다.
① 복음에 대한 핍박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보다 충실히, 그리고 바르게 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상대적으로 핍박이 가증되어 찾아들기 마련이다. 바울은 자신이 십자가를 증거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모진 핍박을 받았다고 말했다. 갈5:11/6:17을 보라.
② 두 번째로 복음을 떠나게 되는 동기는 복음의 의미를 변개시키는 다른 유혹들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다른 유혹들이라 함은 명백하게 판단된 일단의 가르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비스므레한 유사성으로 인하여 진리를 떠나게 되는 위험이 있다.
n 상급주의로 나가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이것은 단단히 명심하여야 할 심히 괴악한 가르침이다. 유대인들의 실패가 이같은 사고 방식에 의한 것이었다.
n 치유주의로 나가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저들은 예수께서 베푸신 각종 기적들을 자신의 삶에 재현시키는 일에다 복음의 모든 의미를 부여한다.
n 신앙주의로 나가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믿는다는 말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가운데, 단순히 입술로 하는 시인의 차원에서 이해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4) 이런 식의 두 가지 형태의 유혹은 여지없이 미숙한 그리스도인을 타락시키게 된다. 안타깝게도 갈라디아 교회가 바로 이런 형태의 유혹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래서 저들은 단순히 복음을 떠나기만 했던 것이 아니다. 저희는 아예 다른 복음을 좇았다. 더 나아 보이는 것을 좇기 위하여 바울에게서 받았던 귀한 가르침을 간단없이 저버렸다.
① 저희는 처음에 바르게 시작하였으나 점차 다른 길로 갔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 이렇게 될 위험이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는 여전히 유혹의 검은 눈동자의 시야에 들어 있다. 따라서 지속적인 성경연구와 그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신앙적 성숙의 끊임없는 상승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
② 현재 누리고 있으며 그리고 이미 받은 것의 풍부함과 위대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무익한 호기심에 마음을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사실 아담과 하와는 단 하나의 금지를 불만스럽게 여겼던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③ 공연히 감정적이 되어서 그릇된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을 맹목적으로 맹종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이런 사람은 현재의 분에 넘치는 은혜에 대해서 눈이 멀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이미 가진 것의 보배로움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는 더 나아 보이는 허상의 것을 추구한다. 바로 이런 식으로의 점진적인 과정을 통하여 크게 벗나가기 마련인 것이다.
3.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있어서 문제점은 이상과 같은 사실에 있었다. 저들은 이미 받은 것의 영광됨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중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에 현혹되었다. 저들의 대충 대충 알고 또한 부분적으로 아는 그것이 결국 거짓 선생들의 시험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면 저들 갈라디아 교회를 타락의 길로 이끌었던 다른 복음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는가.
(1) 여기서 다른 복음의 정체는 일차적으로 바울이 전하지 아니했던 사실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바울의 것을 변질시키는 내용이었음은 물론이요, 때로는 한쪽으로 치우치기도 하고, 또 때로는 특정한 부분을 가(加)하거나 감(減)하는 모습을 띄었고, 또한 그럴듯한 인간의 생각을 첨가시키는 등등의 교묘한 모습으로써 찾아들었다. 복음의 변질과 부패는 언제나 이런 식의 과정을 겪는 것을 통해서 되어지기 마련이다.
①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는 율법의 행위를 주장하는 유대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졌던 자들의 거짓된 가르침이 파고들고 있었다. 저들의 거짓된 가르침이란 노골적으로 바울이 전했던 복음을 대항하는 식의 반대되는 가르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런 식의 유치한 방법으로 사람을 미혹할 정도로 어리석은지 않았다.
②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를 믿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율법도 행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율법은 구원을 받는 근거가 되지 않는다. 바울이 여기 갈라디아서의 여러 곳에서 율법의 의미를 바르게 해석하는 일에 생명을 걸다시피 온 힘을 쏟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③ 율법을 행해야 한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사람이 자신의 그럴듯한 행위를 동반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이며, 결국 자신의 의를 내세우는 데에로 나아가도록 부추기는 것을 말한다.
④ 즉 복음을 따르는 이유에 있어서 하나님의 강권하시는 사랑에 붙잡힌 자라고 하는 큰 원리를 망각하게 하는 중에 어느덧 무엇인가 소득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몰아가는 가르침을 심어주는 것이다. 따라서 참 복음으로부터의 다른 복음의 구별은 복음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도록 하는 성격이 가미되고 있느냐의 여부로서 구별이 가능하다.
⑤ 기독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한가지 목적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절대적인 헌신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관점을 말하는 것이다.
⑥ 다른 종료로서의 비 기독교적인 이방 종교들의 무익한 특성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전적으로 섬기는 자가 그 섬김을 통하여 대가로서 얻을 수 있게 되는 어떤 이익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참으로 매사에 있어서 물질적인 유익을 얻는 일과 연결시키는 관점으로 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2) 이처럼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다른 복음의 위험성은, 그 본래적인 유사성으로 말미암아 미숙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거짓됨을 쉽사리 분별할 수 없는 교묘함을 지니고 있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다. 유사성은 제아무리 그럴듯하다 할지라도 영원히 가짜일 뿐이요 본질은 아닌 것이다.
(3) 복음에 있어서 유사성으로부터 그 본질을 정확하게 구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유사성은 그것이 제아무리 본질에 가깝게 접근해 있다 할지라도 그러나 끝가지 다만 유사성일 뿐이다. 오늘날에도 이런 식으로 다른 복음을 섬기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할 가능성은 있는 것이다. 열왕기상12:25-33을 보라.
① 25:27절을 보면, 여로보암이 취한 종교 정책의 근본 목적이 대단히 잘못되어 있었다. 그는 순전히 자기의 왕권을 유지하기 위한 목으로써 그처럼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면적으로 보건대 저희는 여호와를 섬기는 자들로 비쳐지고 있다.
② 28:30절을 보면, 십계명에 명백히 금지되어 있는 바, 여호와의 형상을 만들었다. 저는 형상화를 시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면적으로 보건대 저희는 우상이 아닌 여호와께 섬김의 예를 표하고 있었다.
③ 31절을 보면, 레위 자손이 아닌 보통 백성으로써 제사장을 삼았다. 율법은 이러한 행위를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면적으로 보건대 저희 종교는 참된 여호와의 종교와 마찬가지로 제사장 제도를 가지고 있다.
④ 32-33절을 보면, 율법에 명백하게 명시되어 있는 절기의 날짜를 의도적으로 바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면적으로 보면 저희는 다만 율법에 따라 절기를 지키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4) 여로보암의 이러한 행위는 단지 외형적으로 보기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같이 비쳐지고 있었으나,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놀랍게도 그것이 여호와를 경배하는 것이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전적으로 여호와를 거스리는 무서운 불신앙적인 행위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외적인 유사성의 교묘함으로 말미암아 여간해서 그 위험함이 깨달아지지 아니하였다.
4. 현대의 교회가 처해 있는 동일한 위기는 바로 여기에 있다. 오늘날 대적자 사단은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교묘히 위장하고 있다. 그리하여 복음을 위하는 척 하면서 사실에 있어서는 복음을 교묘하게 변질시킨다. 진실로 문제의 심각성은 저가 복음을 훼방함에 있어서 아예 드러내어 놓고 노골적으로 방해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복음을 위하는 척 하는 가운데 실상은 그것을 교묘하게 파괴해 나간다는 데 있는 것이다. 사단의 사단으로서의 간교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1) 사단이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였다. 따라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함은 당연한 일이다. 바울은 이에 대해서 큰 염려를 가졌다. 저희는 그렇게 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을 살찌우는 것이다. 고후11:14-15를 보라.
① 어느 시대를 무론하고 이런 식으로 역사는 거짓 선지자는 있기 마련이다. 이스라엘의 멸망의 원인이 이에 있었기 때문에 에스겔은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예언하여야 했다. 겔34:1-6을 보라.
②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오는 흉악한 이리의 출현에 대해서 주의를 주셨다. 요10:13-13을 보라.
③ 사도 바울은 자기가 떠난 후에 에베소 교회에 거짓 선지자가 일어날 것을 예감하였다. 행20:29-39를 보라.
(2) 더욱이 부패한 인간은 그 근본적 본성상 천성적으로 다른 복음을 사랑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다른 복음의 특성은 하나님의 일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인데, 이러한 심리를 사단의 간교한 계교가 놓칠리가 없는 것이다. 사람은 천성적으로 종료를 이용한 자기이익 추구의 욕구에 크게 지배받기 마련이다.
① 이것은 자신의 마음 중심에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써 채워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통하여,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마음에서부터 증명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도리어 예수님을 배척했던 유대인들의 경우가 이러하였다. 요5:43-44를 보라.
② 이런 의미에서 바울도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말하기를 누군가가 자신이 전해준 것이 아닌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한다고 책망하였다. 고후 11:4를 보라.
③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의 고귀한 가치를 하락시키고, 사람의 의를 내세우도록 몰아가는 교묘한 가르침으로서의 다른 복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율법주의의 위험한 특성이란 한마디로 이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갈6:13을 보라.
④ 이쯤에 이르러 이제 우리 자신은 과연 어떠한지에 대해서 스스로 질문해 볼 수 있어야 하겠다. 우리는 자신을 살펴봄에 있어서 관대함으로 대해서는 안된다. 겸손하게 자신의 어떠함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자기를 고쳐나가지 못하는 법이다. 하나님의 말씀 아래 자기를 낮출 수 있는 사람은 실로 복되다.
(3) 여기 갈라디아 교회가 만난 위기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저들은 본질과 유사성을 바르게 분별하지 목하는 혼란 속에서 빠져 있었다. 동시에 오늘날의 우리도 이러한 유사성의 유혹들로 둘러싸여 있다. 사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이단들과 사이비들의 홍수 속에 섞여 있는지 모른다.
① 거대한 조직력과 그 외적인 세력의 장대함을 통하여 크게 한 몫을 보는 로마 가톨릭으로서의 이단이 있다.
② 각개 격파술을 특징으로 하는 가운데 기존 믿음의 자녀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여호와의 증인으로서의 이단이 있다.
③ 그럴듯한 인본주의적 정의를 특징으로 하는 자유주의 기독교로서의 이단이 있다.
④ 맹목적인 민족적 우월감을 내세우면서 부와 권세로 그럴듯하게 치장한 문선명의 통일교가 그러하다.
5. 그러나 시실 전통적 보수주의를 자처하는 정통 개혁주의 교회들 속에서도 이러한 위기는 존재한다. 그것은 특히 구원의 종교를 기복신앙화시키는 일 속에서 대체적으로 그 두드러진 모습을 나타낸다. 현대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고통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이 바로 현대판 율법주의의 교묘한 위험인 것이다.
(1) 기독교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오해함으로써 이러한 모순은 간단없이 존재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는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추구하는데 있으며, 또한 그렇게 되는 따라야 만이 그 의미도 있는 것이다.
① 그리스도인의 인생은 삶에 있어서 혹은 죽음에 있어서 나를 무론하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과 관련되는 한에 있어서 그 참된 의미를 가진다. 롬14:7을 보라.
② 먹고 마시고 활동하는 모든 인간적 움직임의 동기와 시작과 그리고 그 결론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야 한다. 고전10:31을 보라.
③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만물의 움직임과 그리고 그 최종적인 돌아감의 영광을 하나님께 두었던 것이다. 롬11:36을 보라.
(2) 하나님은 구원사역을 통하여서만 영광을 받으신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는 구원사역으로서의 주제를 벗어나서는 영광을 받지 아니하신다는 말이다. 이것이 복음의 존재 이유요 또한 목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핵심을 교묘하게 오도시키고 있는 현대판 다른 복음으로서의 유사한 복음들의 위험으로부터, 이제 참 것을 신속히 회복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지상 과제가 여기에서 발견되고 있다.
① 엡2:8-10의 의미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② 딤후3:15-17의 의미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③ 시43:21의 의미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④ 창 18:19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3) 참으로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께서 친히 베푸신 구원 사역을 그 본질적인 내용으로 하는 한에 있어서 비로소 효과적으로 드러난다. 창조주로서, 혹은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이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그러면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과연 무엇인가.
① 첫째로 이것은 자신의 죄인됨을 철저하게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인가에 대해서 피상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철저하게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② 두 번째로 그렇기 때문에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철저하게 의지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전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신에게서 나올 수 있는 일체의 의를 분노와 같이 여겨야 한다. 바리새인보다는 세리가 의롭다함을 받았다. 눅18:9-14를 보라.
③ 다음으로 죄로부터 자신을 거룩히 구별시켜 나가는 일에 삶의 최고의 목표를 두어야 한다. 바로 이 사실 속에서 자신의 구원받은 증거는 그 풍성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다음 두 가지 사실을 명심한다.
n 소극적인 의미에서 율법을 범하지 않는다.
n 적극적인 의미에서 의를 좇아 행한다.
(4) 결론 : 복음은 그 질적인 특성을 성경적으로 바르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라야 만이 자신의 생명 이상의 것으로 여기는 고귀한 보배가 될 것이다. 복음의 진리를 대충 대충 안다거나 혹은 어중간하게 알고 있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자신이 복음을 어중간하게 알고 있는지 또는 그렇지 아니한지의 여부는 자신에게 있어서 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경배의 목적이 무엇에 있는가를 점검해 봄으로써 바르게 판단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목적에 있어서 자기의 의를 내세우기를 좋아한다거나 혹은 어떤 물질적인 만족을 얻기 위한 일 등등에 주된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이미 다른 복음을 좇고 있는 상태라고 보아도 결코 과한 판단이 아니다. 이런 사람은 아직 복음의 본질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전했던 것으로서의 정통적 복음에 대해서 철저하게 배우는 과정을 가져야 할 것이다. 본질이 아닌 한에는 모두가 가짜일 뿐이다. 과연 다른 복음은 바울이 전했던 내용을 그대로 따르지 아니하고, 그럴듯하며 비스므레하게 따르는데 있다. 우리 모두 깨어있지 아니하면 이렇게 되기 쉽상인 연약한 육체를 가졌고 또한 그러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당연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복음을 좇을 수 있는 위험성을 조심하여야 한다.
강의 목표
열왕기상 12:25-33
갈라디아서 1:6-8
고린도후서 11:14-15
이곳에서는 통상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라고 말할 때, 사실상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보다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서 연구하도록 한다. 구원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에는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도 없이, 혹은 잘못 알고 있는 가운데 자신의 구원을 확증하려는 이들이 발견되곤 한다. 구원은 마음의 심리적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명백한 일하심으로서의 구속사이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구원인 것이요, 그래서 복음은 진리로써 증거되고 또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으로서의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여야 한다. 어중간하게 알고 있는 가운데 비슷하고 유사하게 아는 복음적 지식으로는 자칫 잘못 다른 복음을 좇을 위험성에나 놓이게 된다. 이 사실을 크게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자기가 믿고 있는 복된 가치성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다른 복음이 미혹해 올 때 쉽게 넘어지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그 미혹케 하는 것이 더 매력적으로 보여질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그렇게 생각이 들면 여지없이 그 거짓된 것을 좇기 마련이다.
이처럼 복음적 지식을 대충 대충 아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결과를 자신에게 초래시키게 될 것이요, 나아가 자신을 주목하게 되는 다른 사람을 그런 식으로 그릇된 길로 유도하는 잘못까지도 범하게 되는 위험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중간한 진리는 위험한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은 물론이요 나아가 타인까지도 어두움 속으로 빠트릴 수 있는 무서운 함정인 것이다.
들어가는 말
어중간한 진리는 거짓보다 더 위험한 것이다라는 말이 가장 잘 통하는 세계가 있다면 바로 기독교인의 세계일 것이다. 실제로 우리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구속의 진리를 앎에 있어서 대충 대충 안다거나 또한 막연하게 아는 정도밖에 되지 아니하면서도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듯이 생각하는 중에 엄청난 모순에 빠져드는 사람들이 제법 많이 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유대인들은 아무 것도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엄청난 죄를 범하게 되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생각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의 행동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판단하였고 끝내는 사형에로 몰아갔던 것이다.
저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어떠 어떠한 일을 하실 것인가에 대해서 나름대로 알고 있었다. 만일 저들이 이런 것들을 전혀 몰랐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당시 예수께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저들과 논쟁하는데 소비하셨는가를 생각해 보면 놀라울 정도이다. 예수님의 행동은 그들이 알고 있었으며 추종하고 있었던 것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오늘날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늘날의 기독교가 결정적으로 위협을 받는 것은 불신앙인들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나름대로 정당하고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자칭 기독교인들로 말미암아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런 이들이 권세를 잡는 가운데 큰 제도권을 형성하게 하고 있을 경우에 있어서는 문제는 더더욱 심각해지는 것이다.
저들은 자기들이 복음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가운데 정작 참된 복음의 길을 걷는 사람들을 모진 박해 속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동시에 그 거짓된 것을 마치 진리인양 오도시키면서 놀라웁게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크게 하고 있다고 여긴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제일 큰 박해를 받았던 상대는 하나님을 전혀 몰랐던 이방인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매우 모순되게도 하나님을 안다고 자처하였던 유대인에 의한 것이었다. 저들은 부분적으로 알고 있었으며 대충 알고 있었던 그 짧은 진리로써 바울을 거짓 일군으로 몰아갔다. 그들이 보기에 바울은 하나님의 율법을 폐하는 전대미문의 협작꾼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저들 유대인들이 진리의 복음의 길에 큰 거침들이 된다고 보았다. 그들이 전하는 진리란 부분적으로만 옳을 뿐이고 전체적인 차원에서 평가될 때에는 다른 복음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 결과를 낳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바울 사도가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까지 말해야 했던 필연성과 정당성은 이에 있는 것이다.
주제연구
1. 바르게 알지 못하면 시험의 때에 배도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자신들의 구원받은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고 충분하게 이해하는 일일 것이다. 이것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사람은 시험의 순간이 이르게 되면 일순간에 복음을 저버리고 다른 길로 접어들게 될 것이다. 갈라디아 교회의 어리석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신 이를 떠나고야 말았던 이유가 이에 있었다.
(1) 그리스도인임을 자처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의 온전한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음을 본다. 왜냐하면 어느 순간에 이르게 되어 하나님을 쉽게 떠나 버린다거나 혹은 그 분께 드리는 순종의 삶을 온전히 수행하지 아니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그러나 이것은 그가 아예 처음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되어지는 현상인 것이다. 왜냐하면 은혜의 은혜됨을 바르게 이해한 사람으로서 그처럼 복음에서 떠날 수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① 대충 알고 적당히 있으면서도,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배우기를 원치 않는 가운데 엉뚱한 사고를 내는 일이 종종있다.
② 이지적이지 못하여 매사에 쉽게 흥분하고 즉흥적으로 결정하는 바 순전히 감정적인 사람들에 위해서 하나님의 복음이 담고 있는 진리의 진리됨은 그 충만한 빛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③ 오늘날 부끄럽게도 우리 중에 복음을 심리학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팽배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큰 위기이다. 복음을 분위기와 감점의 차원에서 이해해서는 안된다.
(2) 먼저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복음의 의미에 대해서 간략히 점검해 보도록 하자. 실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을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이 비천한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신 중에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빌 2:6-11을 보라.
①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이 땅에 오시사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셔서 성육신하셨다.
② 그러나 매우 모순되게도 자기 백성들로부터 극심한 배척을 받으시는 고난의 생애를 사셨다.
③ 갖가지 박해와 핍박 속에서도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시는 사역을 감당하시는 가운데 끝내는 십자가에 달리셨다.
④ 그리하여 처참한 고통을 맛보시면서 죽어야 할 이유가 없는 분으로서, 그처럼 죽음을 맛보신 가운데 무덤에 장사되셨다.
⑤ 그러나 성령님의 능력 안에서 사흘만에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당당히 부활 하셨으며 40일동안 계시면서 친히 그 사실을 증거하셨다.
⑥ 그리고는 승천하신 가운데 당당히 아버지께로 돌아가셨으며 그분의 우편 보좌에 앉으셨다.
⑦ 그리하여 지상에서 성취하신 구속사역에 근거하여 세상에 성령님을 보내시며 그리하여 당신의 자녀들을 돌보신다.
(3) 복음을 안다고 할 때 이상의 사실을 보다 진지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머물지 말아야 한다. 계속해서 그와 같은 구속의 일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권적으로 주도하신 것이라는 사실 또한 철저히 기억되어야 한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처럼 순종하신 사실 못지 않게 또한 성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사건을 준비하시고 또한 최종적으로 완성하신 사실을 깨닫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구속사에 있어서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주관하시는 것이다.
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구속해 주시기 위하여 화목제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셨다. 즉 구속사역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치밀하신 계획안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롬 3:25를 보라.
②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말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사랑으로써 찾아오셨던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요일4:10을 보라.
③ 바로 이사실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자비의 뛰어난 특성에 잘 드러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심에 있어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그 어떤 댓가와 공포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은혜를 베푸신다. 시55:1을 보라.
(4)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고차원적인 은혜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도록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이었다. 복음이 자체에 내포하고 있는 이러한 특성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각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구원의 정교함을 제대로 인식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① 구원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창세전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구속사를 작정하시고 예정하신 가운데 또한 성취하셨다. 진실로 구속사는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한 일이 아니다. 철두철미 하나님의 계획에 의거한 것이다. 엡 1:3-6을 보라.
② 이 사실을 계시하시는 충분한 계시의 기간을 가지셨다. 구약의 역사가 이런 의미를 가진다. 구약의 율법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게 될 참 믿음의 길을 예시하고 가르치는 역할을 하였다. 갈3:23-24를 보라.
③ 드디어 때가 차매 온전히 성취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저가 오셔서 이루신 사역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속량되었고, 또한 아들의 명분이 얻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갈4:4-7을 보라.
④ 하늘로 승천하신 가운데 당신께서 성취하신 구속의 효과를 구체적으로 자기 백성에게 적용시키신다. 이 일을 위하여 믿는 자들에게 임하시는 성령님의 내주하심이 진행되고 있다. 요 14:16-17을 보라.
⑤ 이리하여 성령께서는 믿는 자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사역에로 효과적으로 연결되게 하는 구원의 보증의 영이 되신다. 즉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신다. 엡 1:13-14를 보라.
n 구원의 보증이다. 고후1:22/5:5를 보라.
n 부활의 보증이다. 롬 8:9-11을 보라.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은 이제 하나님을 떠났다. 몰론 이 말은 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공개적으로 부인하고 다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아니할 것이다. 왜곡된 진리를 따르고 그 안에 속해 있었음을 인하여 결론적인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저희를 부르신 하나님을 떠났던 것이었다. 어찌되었든지 결론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을 떠나버렸다.
(1)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는 저희가 그리스도를 떠나긴 떠나되 천천히 그랬던 것이 아니라 매우 신속하게 빨리 떠났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처음에 예수님을 잘 믿는 것 같았는데, 그러나 이내 신앙을 저버려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 법이다. 실제로 바울을 그렇게도 따랐던 데마가 그리 같지 아니한 시간 안에 세상으로 가버렸던 사건이 있었다. 딤후4:10을 보라.
① 믿는 바의 도리가 의미하는 복음의 진수를 진지하게 살펴보는 과정을 가져보지도 아니한 가운데, 성급한 결심으로 복음을 받아들인다고 작정한 사람들의 경우에서 이러한 일은 쉽게 나타난다.
② 이 사람은 자기가 그처럼 복음을 받아들인다고 하는 사실이 의미하고 있는 진정한 가치를 미처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시험을 대면하여 복음을 저버리는 불행에로 돌아서는 것이다.
③ 평온할 때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때에 유지하고 있는 자신의 믿음은 그것을 시험할 창수가 일어날 경우 단번에 그 진위성이 드러나게 될 것인데, 이때 복음을 저버리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당시까지 자신이 알고 있었던 진리가 전체적인 것이 아니요 부분적인 것이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2) 떠나거나 배도하는 이유는 세상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데마의 경우가 그러하였다. 저는 여전히 세상을 사랑함으로 인하여 결국에는 복음을 떠났다. 사실 복음과 세상은 상호 대치된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곳에 복음은 거할 자리를 찾지 못하게 된다. 즉 이 말은 복음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복음의 복음됨이 가져다주는 충만한 가치와 만족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①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임을 알아야 한다.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다. 복음의 충만한 맛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만이 더불어 세상까지도 붙잡아 보겠다는 식의 이중적인 혐오스러운 마음을 가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스스로 하나님의 원수됨을 자초하는 데로 나아가는 것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 약 4:4를 보라.
② 복음을 받아들였노라 하면서도,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잇는 사람은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단순히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차원에서 생각되어질 일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권세를 잡은 자인 사단을 추종하는 차원에로까지 나아가는 것이며, 그 사실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인 것이다. 오일 2:15-16을 보라.
③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것의 위험성을 염려하시는 가운데 이 문제에 재해서 친히 언급하셨다. 그 분께서는 세상을 사랑하는 가운데 동시에 하나님 역시 그렇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셨다.
n 마6:24를 보라.
n 행 20:35를 보라.
n 딤전 6:3, 6-10을 보라.
n 잠11:24-25, 30:9를 보라.
④ 물질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하나님의 사랑이어서는 안도고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구원 그 자체를 즐거워 할 수 있어야 한다. 합 3:17-18을 보라.
(3) 환상적 축복론에 의해 부추겨진 신앙은 사실상 구원얻는 신앙이 되지 않는다. 그런 이들은 불이익적 고난이 올 경우 즉시로 배도하기 마련이다. 이런 이들은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이러한 사람은 복음적 진리를 순종함에 있어서 더 이상 견디기 어렵다고 판단되는 나름대로의 적절한 기회들이 이르게 되면, 그 때에는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이 세상으로 돌아가고야 말 것이다. 몰론 복음을 떠나는 일이 순전히 자신의 내적인 동기만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외부적인 유혹과 관련하여 복음을 떠나게 되는 일도 있다. 이때에는 통상 떠나게 되는 동기가 두 가지의 경우로 압축된다.
① 복음에 대한 핍박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보다 충실히, 그리고 바르게 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상대적으로 핍박이 가증되어 찾아들기 마련이다. 바울은 자신이 십자가를 증거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모진 핍박을 받았다고 말했다. 갈5:11/6:17을 보라.
② 두 번째로 복음을 떠나게 되는 동기는 복음의 의미를 변개시키는 다른 유혹들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다른 유혹들이라 함은 명백하게 판단된 일단의 가르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비스므레한 유사성으로 인하여 진리를 떠나게 되는 위험이 있다.
n 상급주의로 나가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이것은 단단히 명심하여야 할 심히 괴악한 가르침이다. 유대인들의 실패가 이같은 사고 방식에 의한 것이었다.
n 치유주의로 나가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저들은 예수께서 베푸신 각종 기적들을 자신의 삶에 재현시키는 일에다 복음의 모든 의미를 부여한다.
n 신앙주의로 나가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믿는다는 말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가운데, 단순히 입술로 하는 시인의 차원에서 이해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4) 이런 식의 두 가지 형태의 유혹은 여지없이 미숙한 그리스도인을 타락시키게 된다. 안타깝게도 갈라디아 교회가 바로 이런 형태의 유혹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래서 저들은 단순히 복음을 떠나기만 했던 것이 아니다. 저희는 아예 다른 복음을 좇았다. 더 나아 보이는 것을 좇기 위하여 바울에게서 받았던 귀한 가르침을 간단없이 저버렸다.
① 저희는 처음에 바르게 시작하였으나 점차 다른 길로 갔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 이렇게 될 위험이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는 여전히 유혹의 검은 눈동자의 시야에 들어 있다. 따라서 지속적인 성경연구와 그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신앙적 성숙의 끊임없는 상승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
② 현재 누리고 있으며 그리고 이미 받은 것의 풍부함과 위대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무익한 호기심에 마음을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사실 아담과 하와는 단 하나의 금지를 불만스럽게 여겼던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③ 공연히 감정적이 되어서 그릇된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을 맹목적으로 맹종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이런 사람은 현재의 분에 넘치는 은혜에 대해서 눈이 멀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이미 가진 것의 보배로움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는 더 나아 보이는 허상의 것을 추구한다. 바로 이런 식으로의 점진적인 과정을 통하여 크게 벗나가기 마련인 것이다.
3.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있어서 문제점은 이상과 같은 사실에 있었다. 저들은 이미 받은 것의 영광됨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중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에 현혹되었다. 저들의 대충 대충 알고 또한 부분적으로 아는 그것이 결국 거짓 선생들의 시험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면 저들 갈라디아 교회를 타락의 길로 이끌었던 다른 복음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는가.
(1) 여기서 다른 복음의 정체는 일차적으로 바울이 전하지 아니했던 사실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바울의 것을 변질시키는 내용이었음은 물론이요, 때로는 한쪽으로 치우치기도 하고, 또 때로는 특정한 부분을 가(加)하거나 감(減)하는 모습을 띄었고, 또한 그럴듯한 인간의 생각을 첨가시키는 등등의 교묘한 모습으로써 찾아들었다. 복음의 변질과 부패는 언제나 이런 식의 과정을 겪는 것을 통해서 되어지기 마련이다.
①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는 율법의 행위를 주장하는 유대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졌던 자들의 거짓된 가르침이 파고들고 있었다. 저들의 거짓된 가르침이란 노골적으로 바울이 전했던 복음을 대항하는 식의 반대되는 가르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런 식의 유치한 방법으로 사람을 미혹할 정도로 어리석은지 않았다.
②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를 믿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율법도 행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율법은 구원을 받는 근거가 되지 않는다. 바울이 여기 갈라디아서의 여러 곳에서 율법의 의미를 바르게 해석하는 일에 생명을 걸다시피 온 힘을 쏟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③ 율법을 행해야 한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사람이 자신의 그럴듯한 행위를 동반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이며, 결국 자신의 의를 내세우는 데에로 나아가도록 부추기는 것을 말한다.
④ 즉 복음을 따르는 이유에 있어서 하나님의 강권하시는 사랑에 붙잡힌 자라고 하는 큰 원리를 망각하게 하는 중에 어느덧 무엇인가 소득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몰아가는 가르침을 심어주는 것이다. 따라서 참 복음으로부터의 다른 복음의 구별은 복음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도록 하는 성격이 가미되고 있느냐의 여부로서 구별이 가능하다.
⑤ 기독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한가지 목적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절대적인 헌신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관점을 말하는 것이다.
⑥ 다른 종료로서의 비 기독교적인 이방 종교들의 무익한 특성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전적으로 섬기는 자가 그 섬김을 통하여 대가로서 얻을 수 있게 되는 어떤 이익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참으로 매사에 있어서 물질적인 유익을 얻는 일과 연결시키는 관점으로 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2) 이처럼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다른 복음의 위험성은, 그 본래적인 유사성으로 말미암아 미숙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거짓됨을 쉽사리 분별할 수 없는 교묘함을 지니고 있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다. 유사성은 제아무리 그럴듯하다 할지라도 영원히 가짜일 뿐이요 본질은 아닌 것이다.
(3) 복음에 있어서 유사성으로부터 그 본질을 정확하게 구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유사성은 그것이 제아무리 본질에 가깝게 접근해 있다 할지라도 그러나 끝가지 다만 유사성일 뿐이다. 오늘날에도 이런 식으로 다른 복음을 섬기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할 가능성은 있는 것이다. 열왕기상12:25-33을 보라.
① 25:27절을 보면, 여로보암이 취한 종교 정책의 근본 목적이 대단히 잘못되어 있었다. 그는 순전히 자기의 왕권을 유지하기 위한 목으로써 그처럼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면적으로 보건대 저희는 여호와를 섬기는 자들로 비쳐지고 있다.
② 28:30절을 보면, 십계명에 명백히 금지되어 있는 바, 여호와의 형상을 만들었다. 저는 형상화를 시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면적으로 보건대 저희는 우상이 아닌 여호와께 섬김의 예를 표하고 있었다.
③ 31절을 보면, 레위 자손이 아닌 보통 백성으로써 제사장을 삼았다. 율법은 이러한 행위를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면적으로 보건대 저희 종교는 참된 여호와의 종교와 마찬가지로 제사장 제도를 가지고 있다.
④ 32-33절을 보면, 율법에 명백하게 명시되어 있는 절기의 날짜를 의도적으로 바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면적으로 보면 저희는 다만 율법에 따라 절기를 지키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4) 여로보암의 이러한 행위는 단지 외형적으로 보기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같이 비쳐지고 있었으나,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놀랍게도 그것이 여호와를 경배하는 것이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전적으로 여호와를 거스리는 무서운 불신앙적인 행위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외적인 유사성의 교묘함으로 말미암아 여간해서 그 위험함이 깨달아지지 아니하였다.
4. 현대의 교회가 처해 있는 동일한 위기는 바로 여기에 있다. 오늘날 대적자 사단은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교묘히 위장하고 있다. 그리하여 복음을 위하는 척 하면서 사실에 있어서는 복음을 교묘하게 변질시킨다. 진실로 문제의 심각성은 저가 복음을 훼방함에 있어서 아예 드러내어 놓고 노골적으로 방해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복음을 위하는 척 하는 가운데 실상은 그것을 교묘하게 파괴해 나간다는 데 있는 것이다. 사단의 사단으로서의 간교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1) 사단이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였다. 따라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함은 당연한 일이다. 바울은 이에 대해서 큰 염려를 가졌다. 저희는 그렇게 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을 살찌우는 것이다. 고후11:14-15를 보라.
① 어느 시대를 무론하고 이런 식으로 역사는 거짓 선지자는 있기 마련이다. 이스라엘의 멸망의 원인이 이에 있었기 때문에 에스겔은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예언하여야 했다. 겔34:1-6을 보라.
②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오는 흉악한 이리의 출현에 대해서 주의를 주셨다. 요10:13-13을 보라.
③ 사도 바울은 자기가 떠난 후에 에베소 교회에 거짓 선지자가 일어날 것을 예감하였다. 행20:29-39를 보라.
(2) 더욱이 부패한 인간은 그 근본적 본성상 천성적으로 다른 복음을 사랑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다른 복음의 특성은 하나님의 일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인데, 이러한 심리를 사단의 간교한 계교가 놓칠리가 없는 것이다. 사람은 천성적으로 종료를 이용한 자기이익 추구의 욕구에 크게 지배받기 마련이다.
① 이것은 자신의 마음 중심에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써 채워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통하여,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마음에서부터 증명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도리어 예수님을 배척했던 유대인들의 경우가 이러하였다. 요5:43-44를 보라.
② 이런 의미에서 바울도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말하기를 누군가가 자신이 전해준 것이 아닌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한다고 책망하였다. 고후 11:4를 보라.
③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의 고귀한 가치를 하락시키고, 사람의 의를 내세우도록 몰아가는 교묘한 가르침으로서의 다른 복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율법주의의 위험한 특성이란 한마디로 이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갈6:13을 보라.
④ 이쯤에 이르러 이제 우리 자신은 과연 어떠한지에 대해서 스스로 질문해 볼 수 있어야 하겠다. 우리는 자신을 살펴봄에 있어서 관대함으로 대해서는 안된다. 겸손하게 자신의 어떠함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자기를 고쳐나가지 못하는 법이다. 하나님의 말씀 아래 자기를 낮출 수 있는 사람은 실로 복되다.
(3) 여기 갈라디아 교회가 만난 위기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저들은 본질과 유사성을 바르게 분별하지 목하는 혼란 속에서 빠져 있었다. 동시에 오늘날의 우리도 이러한 유사성의 유혹들로 둘러싸여 있다. 사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이단들과 사이비들의 홍수 속에 섞여 있는지 모른다.
① 거대한 조직력과 그 외적인 세력의 장대함을 통하여 크게 한 몫을 보는 로마 가톨릭으로서의 이단이 있다.
② 각개 격파술을 특징으로 하는 가운데 기존 믿음의 자녀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여호와의 증인으로서의 이단이 있다.
③ 그럴듯한 인본주의적 정의를 특징으로 하는 자유주의 기독교로서의 이단이 있다.
④ 맹목적인 민족적 우월감을 내세우면서 부와 권세로 그럴듯하게 치장한 문선명의 통일교가 그러하다.
5. 그러나 시실 전통적 보수주의를 자처하는 정통 개혁주의 교회들 속에서도 이러한 위기는 존재한다. 그것은 특히 구원의 종교를 기복신앙화시키는 일 속에서 대체적으로 그 두드러진 모습을 나타낸다. 현대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고통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이 바로 현대판 율법주의의 교묘한 위험인 것이다.
(1) 기독교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오해함으로써 이러한 모순은 간단없이 존재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는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추구하는데 있으며, 또한 그렇게 되는 따라야 만이 그 의미도 있는 것이다.
① 그리스도인의 인생은 삶에 있어서 혹은 죽음에 있어서 나를 무론하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과 관련되는 한에 있어서 그 참된 의미를 가진다. 롬14:7을 보라.
② 먹고 마시고 활동하는 모든 인간적 움직임의 동기와 시작과 그리고 그 결론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야 한다. 고전10:31을 보라.
③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만물의 움직임과 그리고 그 최종적인 돌아감의 영광을 하나님께 두었던 것이다. 롬11:36을 보라.
(2) 하나님은 구원사역을 통하여서만 영광을 받으신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는 구원사역으로서의 주제를 벗어나서는 영광을 받지 아니하신다는 말이다. 이것이 복음의 존재 이유요 또한 목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핵심을 교묘하게 오도시키고 있는 현대판 다른 복음으로서의 유사한 복음들의 위험으로부터, 이제 참 것을 신속히 회복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지상 과제가 여기에서 발견되고 있다.
① 엡2:8-10의 의미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② 딤후3:15-17의 의미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③ 시43:21의 의미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④ 창 18:19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3) 참으로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께서 친히 베푸신 구원 사역을 그 본질적인 내용으로 하는 한에 있어서 비로소 효과적으로 드러난다. 창조주로서, 혹은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이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그러면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과연 무엇인가.
① 첫째로 이것은 자신의 죄인됨을 철저하게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인가에 대해서 피상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철저하게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② 두 번째로 그렇기 때문에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철저하게 의지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전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신에게서 나올 수 있는 일체의 의를 분노와 같이 여겨야 한다. 바리새인보다는 세리가 의롭다함을 받았다. 눅18:9-14를 보라.
③ 다음으로 죄로부터 자신을 거룩히 구별시켜 나가는 일에 삶의 최고의 목표를 두어야 한다. 바로 이 사실 속에서 자신의 구원받은 증거는 그 풍성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다음 두 가지 사실을 명심한다.
n 소극적인 의미에서 율법을 범하지 않는다.
n 적극적인 의미에서 의를 좇아 행한다.
(4) 결론 : 복음은 그 질적인 특성을 성경적으로 바르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라야 만이 자신의 생명 이상의 것으로 여기는 고귀한 보배가 될 것이다. 복음의 진리를 대충 대충 안다거나 혹은 어중간하게 알고 있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자신이 복음을 어중간하게 알고 있는지 또는 그렇지 아니한지의 여부는 자신에게 있어서 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경배의 목적이 무엇에 있는가를 점검해 봄으로써 바르게 판단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목적에 있어서 자기의 의를 내세우기를 좋아한다거나 혹은 어떤 물질적인 만족을 얻기 위한 일 등등에 주된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이미 다른 복음을 좇고 있는 상태라고 보아도 결코 과한 판단이 아니다. 이런 사람은 아직 복음의 본질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전했던 것으로서의 정통적 복음에 대해서 철저하게 배우는 과정을 가져야 할 것이다. 본질이 아닌 한에는 모두가 가짜일 뿐이다. 과연 다른 복음은 바울이 전했던 내용을 그대로 따르지 아니하고, 그럴듯하며 비스므레하게 따르는데 있다. 우리 모두 깨어있지 아니하면 이렇게 되기 쉽상인 연약한 육체를 가졌고 또한 그러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당연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복음을 좇을 수 있는 위험성을 조심하여야 한다.
출처 : JESUS - KOREA(은혜동산)
글쓴이 : 갈샘나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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