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톨릭의 구원관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 1:8, 2:16).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엡 2:8, 9).
“만약 누구든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성례가 구원을 위하여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거나 성례 없이도 사람이 믿음만으로 의롭다는 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지어다.” (트렌트 공회, 7, 총회, 4)
“교회 내에서 가장 상고로부터 선행은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 봉헌되어왔다. 거룩한 백성들의 기도들과 선행들로 인하여 참회자는 씻음과 죄사함과 구속함을 받았다.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서 그를 믿는 자들은 언제나 자신의 죄와 다른 사람의 죄의 속죄를 위해서 그리고 그들의 형제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얻은데 도움이 되도록 십자가를 져 왔다.” (바티칸 2, 면죄부에 규정에 관한 개정에 대한 사도적 헌법 2-5, 3-6.)
거룩한 유전(전통)과 성경은 하나님의 유일한 신탁이라고 바티칸 2 공회는 선언한다. 전통과 성경이 모순이 될 때 로마 교회는 전통을 따른다. 그 결과 개신교와 카톨릭 간에는 무한한 간격이 생겼다. 곧 구원 문제이다. 지난 400년 이상 동안 카톨릭과 개신교는 한번도 변함없이 서로의 구원관이 다름을 인정하여 왔다. 그럼에도 일부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카톨릭과 개신교가 같은 구원의 길을 말한다고 오해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챨스 콜슨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서로 다른 점이 있지만, 고대 신경들과 기독교의 기본 교리에 있어서 서로 같은 입장이다.” 천만의 말씀이다. 신경에 동의하는 것은 같다고 하자. 그러나 신경은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러나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 내용이다. 이 점에서 복음과 카톨릭은 영원한 차이점을 나타낸다.
구원 받은 자들과 구원 받지 못한 자들
성경은 두 종류의 사람들에 대해서만 언급한다. 구원을 받은 사람과 받지 못한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잃어버린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 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 (눅 19:10, 요 12:47).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주님을 보내셨다 (요 3:16-17).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오셨다고 증거하고 있다 (딤전 1:15).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얻는 것인가? 죄로 인하여 그들은 심판을 받게 되며 나아가 하나님과 영원히 격리되게 된다. 이로부터의 구원이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 3:36).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순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살후 2:8-9, 2:12).
복음은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라고 선언하고 있다 (고전 15:3-4). 복음주의자들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의 역사를 사실로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죄의 용서와 영생을 주시는 것을 믿고 있다. 바울은 말하기를 “너희가 이 복음을 인하여 구원을 받았다”고 말한다.
사람은 복음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구원을 얻는다. 내가 어떻게 구원을 얻으리이까 라는 간절한 절규에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대답하였다 (행 16:30-31). 또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롬 10:9-10). 이와 같이 구원을 얻는 것은 간단하다.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부터 그 영혼은 구원을 얻는다. 그리고 다시는 그 구원을 잃을 수 없다. 그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났다 (요 5:24). 이제는 천국이 그의 집이다. 사망이란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후 5:8).
복음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죄의 용서를 받고 영생을 얻은 자가 그리스도인이요, 성령으로 중생하여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음을 안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것이다 (요 10:28). 또한 “심판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 (요 5:24). 그의 구원은 확고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대신하셨기 때문이다.
복음의 목표: 죄인들의 구원
성경 말씀에 지적으로 동의한다고 하여 구원 얻는 것은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무엇을 하셨는지 정확히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해야 한다. 이러한 믿음을 통해서 사람은 구원을 얻는다.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엡 2:8).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이제 우리는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침례교, 감리교, 장로교에 소속이 되었기 때문에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이 그 사람 안에 계시기 때문에 구원 받았다. “주께서 구원 받은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47). 한 성령으로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례를 받았다 (고전 2:13). 이것이 “기쁜 소식”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다 (막 16:15).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맡기신 사명이다. 이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천하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복음을 아는 자들의 인류를 향한 소망이요 열망이다.
카톨릭은 “구원 받은 자”들이 아니다.
개혁자들은 카톨릭교의 가르침이 구원을 주는 복음이 아니라 가짜 복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자들이었다. 카톨릭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는 관계가 아니라 교회에 속박하는 관계로 만들었다. 카톨릭 교회는 교인들이 교회의 규정을 잘 따르면 결국 교회가 천국으로 이끌어 줄 것이라고 쇠뇌시켜 왔다. 카톨릭 교리에 의하면, 구원이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복종하여 선행을 계속하고 종교 의식을 계속 지킴으로 얻어진다.
이제 성서적 복음을 믿게 된 개혁자들은 자신이 구원 받은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에 그들을 구원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 결과로 그들은 파문과 핍박을 당하였으며,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으로 인하여 순교하였다.
트렌트 종교 회의가 개혁자들에 대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열렸다. 트렌트 회의는 성경에 대한 권위, 은혜와 믿음으로 얻게 되는 구원, 신자의 만인 제사장 교리에 이르기까지 종교 개혁의 주장을 전부 부인해 버렸다. 그 뿐만 아니라 복음주의자들이 신봉하는 교리들을 수용하는 자는 누구나 정죄하고 약 100 회 이상의 저주로 그들을 저주하였다. 그들이 내린 저주 가운데 지금까지 단 하나의 저주도 철회된 적이 없다.
이것은 누구나 아는 분명한 역사이다. 복음주의의 신앙이나 카톨릭의 신앙에 있어서 변화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복음 주의 내에는 카톨릭의 잘못을 지적하는 복음주의자들을 “카톨릭을 헐뜯는 자”로 비난하는 사례들이 있다. 그렇다면 개혁자들을 100회 이상 “저주 받은 자들”로 정죄하고 아직까지도 그 저주들을 철회하지 않는 카톨릭 교황청은 왜 비난하지 않아야 하는가!
대중들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이후 카톨릭이 달라졌다고 믿고 있다. 이 공의회는 종교 다원화로 가기 위한 연합이 그 목표를 이루고 있다. 개신교를 “분리된 형제”로 인정하자고 한 점, 동방 교회와 연합에 힘쓰자는 점 등이 그렇다. 그러나 교리 자체는 약간의 변화가 있을 뿐이다. 예를 들면, 미사를 드릴 때 라틴어를 사용하지 않고 자국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한 점과 예식 집전에서 사제를 돕는 복사(Altar server)를 여자도 세울 수 있도록 한 점이다.
“본 거룩한 공회는 지금 하늘의 영광 속에서 살고 있는 형제들이나 혹은 연옥 속에서 아직도 정결의 과정을 겪고 있는 형제들과 우리들 간에 존재하고 있는 살아있는 교제 속에서 우리 조상들의 경건한 신앙을 충성스럽게 수용하는 바이며 또한 본 공회는 제2 니케아 공회 (787년 프로렌스 공회: 1438-1442) 및 트렌트 공회 (1545-1563)의 선언들을 다시 추천하는 바이다.”
카톨릭교의 구원
카톨릭교도 구원을 설교한다. 그러나 그들의 설교는 성경과 정면으로 반대된다. 그들의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의 완성된 사역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복종을 통해서 주어지는 구원이다. 카톨릭 신자들 중에서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자가 없다. 그러한 확신을 말한다는 것은 스스로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파문과 저주를 초래하는 밀이 된다.
“만약 누구든지 속죄를 얻기 위하여 주저함이 없이 확신을 가지고 용서를 받았다고 말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트렌트 공회, 6-16-13). “만약 누구든지 신자의 견인 (자신이 영원히 구원을 받았다)을 확신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트렌트 공회, 6-16-16). (Austin Flannery, O. O., gen. ed., Vatican Council II: The Conciliar and Post Conciliar Documents, rev. ed. (Costello Publishing, 1988), vol. 1, p. 44).
로마 카톨릭 교회는 구원을 위해 필요한 사역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이미 이루신 것이 결코 아니며,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는 단순한 믿음만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구원이란 행위와 의식과 교회에서 지정하는 고난을 일생 동안 수행하며, 심지어는 연옥에까지 가서도 계속해야만 하는 과정을 거쳐야 된다고 주장한다.
“만약 누구든지 칭의의 은혜를 받은 후에 회개한 자들에게는 죄책이 면해졌으며 영원한 형벌의 빚이 탕감되었다고 말하며, 하늘 문들이 열리기 전에 이 세상에서나 연옥에서 갚아야 할 벌들이 다 소멸되었다고 말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H. J. Schroeder, O. O., trans., The Canons and Decrees of the Council of Trent (Tan Books, 1978), p. 46.)
트렌트 공회는 물론 “회개한 죄인”이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들이 이렇게 말할 때 성서적으로 들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미혹을 당한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복음주의자들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지만 사실 그 의미는 전혀 다르다. 트렌트 공회는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은 “회개한 죄인”은 여전히 자신의 죄를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이 땅과 연옥에서 고통을 당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 교리야말로 십자가 위에서 죄인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충분성을 부인하는 행위이다. 놀랍게도 이 가르침이 바로 바울이 저주한 거짓 복음이다 (갈 1:8).
성경은 수없이 구원이란 공력이 아니라 은혜임을 말한다. 그럼에도 로마 카톨릭은 그의 “새로운 법”에 순종하는 공력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고집하고 있다. 제 2 차 바티칸 공회는 주교들만이 선포할 수 있는 “복음의 전파”로 하여금 사람들은 “믿음과 영세와 그리고 계명의 준수를 통하여 구원을 얻는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는 성경과 상반된다.
구속 (Redemption) : 완성되었는가? 아니면 진행되는 과정인가?
구원을 받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일은 성례들에 참여하는 것이다. 특별히 영세와 미사에 참예하여야 한다. 구원의 긴 여정은 영세를 통하여 시작되고 그 이후에 성례들에 참여해야 하며 계속적으로 여러 선행 및 고난의 일생을 살아야 한다. 카톨릭 신자들은 아무도 자신들의 결말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다. 얼마나 긴 세월이 흘러야 구원을 받게 되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그저 큰 죄 가운데 빠지지 않기 만을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연옥이 아니라 영원히 빠져 나올 수 없는 지옥에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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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예배의식 (Liturgy), 특별한 성찬의 신적 제사를 통해서 우리의 구속 사역이 성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이 전파한 구원의 사역이 제사와 성례들을 통한 “긴 연속”을 통하여 이루도록 뜻하셨으며, 예배의 삶은 바로 이 제사와 성례들을 주축으로 살아야 한다. 이러한 예배 의식이야말로 교회의 모든 권세가 흘러 나오는 샘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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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속죄는 십자가 위에서 바친 그리스도의 희생만으로 가능하며 이를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가 그의 피를 인하여 구속함을 받았다” (엡 1:7; 골 1:14).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 9:12).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고 로마 교회는 예배 의식에 의한 속죄를 계속 진행시키고 있다. 이 점에서 로마 카톨릭은 성경과 대치되며 이 점은 치명적이다.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사도들이 전파해 온 하나님의 은혜 안에는 예배 의식에 관한 내용은 찾아볼 수가 없으며 더욱이 그 예배 의식이 속죄를 이루는 수단이 된다거나 혹은 “교회의 모든 권세가 흘러 나오는 샘물”이라는 소리는 들어 볼 수도 없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소위 로마의 “사도 전통” 이라는 것의 일부로서 훗날 형성된 것들이며, 사도들의 교훈이었다는 흔적은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카톨릭 교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는 복음주의자들은 자주 말하기를 “자유주의 프로테스탄트들에게서보다는 차라리 카톨릭 교인들에게서 더 많은 공통점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자유주의 프로테스탄트들보다는 차라리 정치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보수적인 무신론자들이나 불교 신자들에게서 더 많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구원은 정치나 윤리 혹은 사회 운동과는 무관한 것이다. 어떤 카톨릭인은 매우 도덕적인 사람이거나 혹은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사람일 수 있다. 그러나 구원 문제에 관한 한 그가 다니는 교회는 성경의 교훈과 정반대의 것을 가르치고 있다.
전에 카톨릭 신도였던 한 사람의 설명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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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카톨릭 교회가 나의 가족들에게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깊은 슬픔을 느끼고 있다. 내 어머니를 지옥에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내 어머니는 예수님의 교회와 바른 관계만 유지하고 있으면 만사가 해결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예수님을 알아야 할 필요나 성경 말씀을 스스로 읽어야 할 필요 등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다.
그분이 하는 일이라고는 매 주일 미사에 참석하는 것과 꼭 지켜야 할 성일들에 참석하는 일이다. 어머니는 고해성사에 충실하고 몸바쳐 베푸는 봉사의 일에 정규적으로 참여하며, 속죄를 위해서 성인들과 마리아에게 바치는 많은 기도문을 암송하고 있다.
남은 죄를 다 갚을 때까지 고통을 받다가 연옥의 불길에서 벗어나 진주 문에 들어가게 할 어머니의 통행증서는 그의 선행들과 소위 성례들에 참여한 행적들이다. 천국에 들어가는 문의 열쇠는 베드로가 가지고 있다가 교황들에게 전수해 주었기 때문에 어머니 생각에는 교황에 대한 순종이 곧 문제 해결의 열쇠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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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은혜인가, 공로인가?
바울이 전파한 복음에는 “구원의 길”이 제2 바티칸 공회가 선포한 바와 같이 카톨릭 교회의 예배 의식을 통해서 “긴 연속”을 이루도록 되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일이며, 십자가 위에서 한번이자 마지막으로 성취되어 버린 사건이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 (빌 2:12)는 구절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무슨 일을 해야한다는 의미는 결코 될 수가 없다. 이런 견해야 말로 성경에서 철저하게 정죄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오직 그 의미는 이제 구원을 받았으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 선한 일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엡 2:10) 살아야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미 받은 구원을 더욱 다지는 것이다 (렘 33:9).
죄인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것은 마치 죽은 시체가 스스로 수혈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본질상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다 (골 2:1; 골 2:13). 그러나 카톨릭 교리에 따르면 인간은 다만 “죄로 인해 상함을 받을 뿐”이지 죄로 죽은 것은 아니다. 따라서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일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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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모든 감정의 종살이를 청산해 버리고, 스스로 선한 것을 택함으로 자신의 목표를 향하여 전진할 때 그리고 근면과 기술을 통하여 이 목적에 부합하는 수단을 획득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주신 존엄성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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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그와는 반대로, 죄인의 “의”는 하나님의 목전에 “더러운 걸레” 만도 못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 64:6). 오직 구원을 받은 후에야 우리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선행을 행할 수 있다. 구원을 받기 위한 선행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행하는 선행이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사람은 자신의 죄책과 스스로는 도저히 구원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과 그의 대속을 받아들여야 한다. 성경은 되풀이해서 구원은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믿음과 은혜에 의한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인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이다 (행 15:11). 너희가 은혜를 인하여 구원을 받았다 (엡 2:5).
디도서 2:11절을 보면 구원을 이루는 은혜에 대하여 말한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딛 2:11). 은혜란 그저 하늘의 하늘에서 부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에 의해서 죄의 빚이 완전히 지불된 것을 조건으로 주어진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그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롬 3:24). 따라서 행위와 의식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카톨릭의 구원관은 하나님의 은혜와는 정반대의 교리이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인하여 구원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공급을 거부해 버리는 행위이다. 그들의 구원관은 그리스도의 희생이 사람들의 공력이나 고행으로 보충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하여 믿어야 할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다 (행 20:24). 우리는 은혜를 인하여 구원을 받았다. 은혜란 그 본질상 행위와는 공존할 수 없다. 바울은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고 한다 (롬 11:6). 아무도 은혜를 값 주고 살 수도 없고 공을 들여 얻을 수도 없다. 그런 은혜라면 그것은 이미 은혜가 될 수가 없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은혜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그런 은혜을 받을 자격도 없고, 살 수도 없고, 무슨 공로로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들 뿐이다.
제2 바티칸 공회는 행위에 의한 구원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적극적으로 교회를 추종하는 카톨릭 신도는 그의 구원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부 사제들이나 수녀들은 그들의 신발 밑에 돌을 넣어두기도 하고, 머리 카락으로 만든 셔츠를 입기도 하고, 구원 받는 길이라고 해서 자신을 매질하기도 한다. 교회 성일 날 어느 카톨릭 국가이건 가 보라. 고해하는 자들이 스스로를 떄리며, 순례자들이 마리아 상을 향해서 무릎으로 기어가는 모습들, 또 어떤 사람은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비틀 거리는 모습, 또 다른 사람들은 구원 받을 더 좋은 기회를 얻을 것으로 생각하고, 초들을 사서 이런 저런 이름의 “우리 성모” 상들 앞이나 혹은 다른 “성자들” 상 앞에서 불을 키고 있는 모습들을 보게 된다. 필리핀 등 어떤 곳에서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일부나마 값을 지불한다는 의미에서 어떤 열심파들은 잠시 나마 스스로 십자가에 못을 박아 매달려 몸부림하는 모습도 발견된다. 이런 짓들을 경책하기는커녕 로마 교회는 오히려 장려하고 있다. 공로에 의한 구원은 너무나 분명한 카톨릭의 교회이며 신도들에 의해서 광범하게 실시되고 있는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독일로부터 성경을 들여왔다는 죄목으로 스페인에 세빌레에서 1560년 12월 22일 불태움을 받은 율리안 헤르난데스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의뢰하는 자는 분명히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신앙을 인하여 화형에 처형되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믿었다고 해서 불에 탔다는 사실을 상상해 보라. 그러나 수 십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이 믿음 때문에 로마 교회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다.
구원에 있어서 마리아의 역할
카톨릭 교회는 오랜 세월 동안 “모든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님에게, 예수님으로부터 마리아에게, 마리아로부터 우리 자신에게 전해오고 있다고 가르쳐 왔다.” 우리의 모든 질병을 치료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물이 수도를 통해서 흘러 오는 것처럼 마리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온다.
성 버나드의 말을 기억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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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선물들, 유덕들, 그리고 모든 은혜들은 마리아의 손에서 어느 때나 그 분이 원하시는 대로 주어지고 있다. 오 성모님, 모든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여, 구원의 은혜는 오직 당신의 손을 통하여 베풀어지는 연고로 우리의 구원은 당신께 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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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에 있어서 마리아는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성 버나드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인류는 구원의 수단으로서 그리고 구원의 중재자로서 마리아를 의뢰하여야 한다” 고 주장한다. 여기, 구원에 있어서 마리아의 역할에 대한 카톨릭 성인들의 증언들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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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보나벤투어는 말하기를 “마리아의 보호에 신뢰를 둔 모든 사람들에게는 하늘의 문들이 열릴 것이다”라고 했다. 성 이프렘은 성모에 대한 헌신을 “하늘의 예루살렘 문들을 여는 길”이라고 했다. 또 블로시어스는 “오 부인이여. 당신께 천국의 열쇠들과 보화들이 맡겨져 있나이다” 라고 고백했다. 그러므로 카톨릭 교인들은 성 암브로스의 말과 같이 마리아에게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오 마리아여. 낙원의 문들을 우리에게 열어주소서. 이는 당신이 그 열쇠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 이상으로 교회는 말하기를 “당신이 바로 낙원의 그 문입니다”라고 한다. 왜냐하면 성 풀겐티어스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마리아를 통하여 세상에 오셨고, 마리아를 통하여 인간은 세상에서 하늘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 나의 부인(My Lady)이시요. 당신의 충만한 은혜로 인하여 당신은 우리들의 구원의 길이 되셨으며, 하늘 나라로 올라가는 수단이 되셨나이다.” 라고 성 아타나시어스는 말하고 있다.
“오 하나님의 어머니시요. 당신을 아는 자들이 복이 있는 자들이옵니다. 왜냐하면 당신을 아는 지식은 영생에 이르는 대로이며 당신의 덕을 전하는 것은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성 보나벤투어는 말한다. “궁극적으로 마리아는 하늘의 여주인이시다. 이는 그가 원하시는 대로 명령을 내리고, 그녀가 원하는 자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라고 성 로렌스의 라차드는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에릭 수도원장은 “마리아를 섬기는 자는 그를 위해 마리아가 중보하심으로 그는 이미 천국에 가 있는 것이나 다름없이 보장을 받은 자이다. 마리아를 섬기지 아니하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라고 했다. 성 보나밴투어는 “오 민족들이여. 귀를 기우리라. 천국을 원하는 모든 자들이여, 마리아를 섬기고 공경하라. 그리하면 반드시 영생을 얻으리라”고 외쳤다.
“오 부인이여. 당신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우리의 구원은 확정됩니다.” 라고 성 앤섬은 말하고 있다. 성 안토니어스는 “마리아에 의해서 보호를 받고 있는 영혼들, 마리아는 이 영혼들을 주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당연히 의롭다 함을 받았으며 구원을 받은 자들이다”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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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어떤 저자는 성자들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교회와 성인들은 마리아를 이렇게 영접하고 있다. ‘오 마리아여.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당신은 우리를 속죄합니다. 오 마리아여, 우리의 구원은 당신의 손에 있나이다. 마리아는 온 인류의 공동 구속주 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탄의 권세로부터 인류를 속량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그 몸의 피로, 마리아는 그 심장의 고통으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어떤 카톨릭 전단지를 보니 이렇게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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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를 세번 부름으로 하늘문이 열린다.
구원을 위한 가장 위대한 수단이며 선택의 표적 중 가장 확실한 것 가운데 하나는 최상의 복을 받은 동정녀에게 헌신하는 것이다. 교회의 모든 거룩한 교사들은 다 한결같이 이렇게 일치한다. “마리아에게 심신을 봉헌한 자는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 나는 당신 마리아에게 내 심령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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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 교회 지도부는 마리아 우상 숭배를 장려한다. 주교들과 추기경들, 사제들과 교황들 자신이 가장 돈독한 마리아 숭배자들이다. 그 중 교황 요한 바울 2세를 능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1251년에 성 시몬 스탁에게 나타나서 “위대한 약속”을 준 “갈멜산의 우리 부인”이 1322년 교황 요한 22세에게 다시 나타났다는 것이다. 성 시몬 스탁에게 나타난 갈멜산의 우리 부인은 그에게 다음과 같은 약속을 남겼다. “누구든지 이 망토를 착용하는 자는 영원한 불을 피할 수 있다.” 이러한 갈멜산의 우리 부인이 요한 22세에게 다시 나타나서 그녀의 망토를 입은 자들에게 “안식일의 특권”을 다시 확인하였다고 한다. “은혜의 어머니인 내가 그들이 죽은 후 토요일에 연옥에 내려가서 그녀의 망토를 입은 자는 누구나 다 자유롭게 하리라” 고 약속했다. 이 약속을 알렉산더 5세, 클레멘트 7세, 비오 5세, 그레고리 13세 및 바울 5세 등이 확인했고, 그 이후 수 천만에 달하는 망토 착용 카톨릭 인들은 이 말을 믿어왔다. 드리구오리는 다음과 같이 부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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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바울 5세는 1613년 회칙을 발표하여 망토를 착용한 그리스도인들은 “복 받은 동정녀께서 그녀의 끊임없는 중보와 공력과 특별한 보호를 인하여 그들이 죽은 후, 그들을 도우실 것을 믿어야 할지니라” 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선하신 어머니의 동일한 은혜를 바라지 못할 이유가 있는가? 그리고 만약 우리가 특별한 사랑으로 그 분을 섬기면 연옥을 통과하지 않고 직접 사후에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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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카톨릭 신자들은 지금도 계속해서 성 시몬 스탁이 “갈멜산의 우리 부인”에게 드린 그 기도를 드리고 있다. “망토를 입은 모든 자를 보호하는 여 수호자여. 우리를 위해 중보해 주옵소서. 망토를 입고 죽은 모든 사람들의 소망되시는 이여, 우리를 위해 중보해 주옵소서. 오, 인자하신 마음의 마리아여. 우리에게 구원을 허락하옵소서.”
이제 구원은 마리아를 통해서 오는 것이고, 카톨릭 교회는 하나의 은혜가 아니고 “은혜들”을 가르친다. 미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얻으신 “구원을 위해 필요한 은혜들”을 “점진적으로 그리고 계속해서” “적용”하며 “수여”하는 수단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은혜들”이라는 복수를 성경에서 한 번도 찾을 수 없다. 성경은 우리가 은혜로 구원 받았다고 한다. 그 은혜는 오직 어린양으로부터 온다. “은혜들”에 대한 카톨릭의 개념은 구원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번에 조금씩 성례를 통하여 주어진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 누구도 단 번에 죄 용서와 영생을 얻을 수 없다. 구원의 길을 가면서 계속 더 많은 은혜를 받아야 구원 받을 수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은혜는 대가를 지불해야 받는 은혜들이다! 카톨릭의 은혜들은 구매하는 것들이다.
카톨릭교 내에는 “은혜들”을 얻기 위한 많은 행위들이 있다. 규칙들이 있다. 은혜를 축적할 수 있는 방법들이 있다.
우리는 분명하게 로마 카톨릭 교회와 성서적 가르침에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전자의 경우, 은혜들은 신실한 카톨릭인의 행위에 따라서 마리아의 중보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후자의 경우, 은혜란 그리스도의 행위에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묵주 기도, 마리아 방문, 교회가 시키는 선행을 수행하여야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모욕이다. 또한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만 죄 사함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도전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공의가 요구하는 형벌을 완전히 다 지불했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죄를 용서하시고 영혼을 구원하신다. 이러한 믿음과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를 믿는 자도 의롭다하려 하심이라” 고 하기 때문이다 (롬 3:26).
그러면 선행이란 무엇인가?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선행을 성경은 언급한 적이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그 구원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순종의 열매가 나타난다. 즉, 구원의 증거로서 나타나는 선행이다. 선행이란 사람들이 보는 개념이 아니다. 선행은 그 동기가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사랑이어야 한다. 죄사함에 대한 기쁨이어야 한다. 선행을 행하는 이유가 구원 받기 위한 나의 공력이 되어서는 안된다. 구원은 선물이며 선물을 받은 주의 백성들은 선행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선한 일에 풍성하며, 선한 일에 힘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에 선한 일을 행하게 된다.
구원받은 카톨릭 교인이 있을 수 있는가?
최근 스페인에서 실시한 여론 조사에 의하면 2천 가정 중에 오직 두 사람만이 복음을 알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개신교였다. 나머지 1,998가정은 카톨릭 교인들로서 선행과 교회 출석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나의 친구는 스페인에서 선교사인데 15년을 있었다. 카톨릭 교인들을 만날 때 마다 복음을 증거하였는데, 카톨릭 교인 중에 구원의 길을 아는 사람을 아직 한 사람도 만난 적이 없다고 한다.
한편 복음을 알고 카톨릭을 떠난 수 많은 카톨릭 인을 알고 있다. 그들 중에 단 한 사람도 카톨릭에서 참 복음을 들은 적이 없다고 고백하였다.
혹자는 “분명 카톨릭인 중에는 구원을 받은 사람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물론 누가 궁극적으로 구원을 받게 될지 사람은 모른다. 그러나 로마교 내에는 복음이 없다. 즉, 교회 내부에서는 복음을 알 수가 없다. 오히려 끝까지 속을 수 밖에 없다. 만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어떤 사제가 바른 복음을 깨닫는다면 로마교에 남아 있지 않게 된다. 바로 이러한 탈출이 중세 교회에서 나온 개혁자들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복음을 안 이후에 카톨릭 내부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은 이단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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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톨릭의 구원관 > - 데이브 헌트 - 정태윤 번역 |
출처 : JESUS - KOREA(은혜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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