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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변선환의 생애와 학문을 되살리는 작업
변선환 아키브
얼마 전 한 시사주간지에서 인상깊은(?) 만화를 보았다. 최근 광복절을 기념해 북한을 방문했던 방북단의 돌출행동과 더불어 그 즈음의 상황을 패러디한 그 만화의 제목은 “내 가정의 분열은 눈뜨고 볼 수가 없다"였다. 두 자녀의 일기장을 검사하며 “이런 생각은 안 된다"고 일기장을 북 찢어버리고, 심지어 라면에 “계란을 넣고 끓이자" “넣지 말고 끓이자"고 다투는 자녀들에게 “라면엔 김치를 넣고 끓여야 제 맛이다"라고 명령하는 아버지. 매우 우스꽝스러운 만화였지만, 그 모습이 좀처럼 ‘다른’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국의 현실을 정확히 그려낸 것 같아 씁쓸한 웃음을 지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한국 정치 현실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1992년 한국 감리교회에서는 ‘종교재판'이 열렸었다. 감리교단 총회의 결의에 따라 감리교신학대학교에 재직하던 변선환 교수와 홍정수 교수를 ‘종교다원주의 신학'과 ‘포스트모던 신학'을 유포한 ‘죄'로 교회와 학교에서 완전히 축출시켰던 것이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라는 단답형의 답변이 유죄판결의 핵심적 사안이 되었던 것을 보면 한국의 기독교가 얼마나 폐쇄적이고 이분법적 사고에 젖어왔는가 잘 알 수 있다. 그렇게 ‘이단'으로 낙인찍혀 학교와 교회를 떠났던 두 교수 중 변선환 교수는 95년에 세상을 타계했다.
6년이 지난 지금, 신학계는 종교간의 대화, 종교신학 논의가 한창이다. 많은 열린 신학자들을 통해 동서의 종교를 넘나드는 학문적 작업은 물론, 사회 문제에 대해서 다양한 종파들이 함께 모여 입장을 표명하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다. 변선환 아키브도 종교신학, 종교간의 대화에 힘쓰고 있는 연구기관이다. 변선환 교수가 타계한 다음 해 3월에 문을 연 변선환 아키브는 변 교수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유족과 후학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국내 최초의 아키브 아키브(Archiv). 한 학자의 기록이나 도서를 모아놓은 서고(書庫)를 가리킨다. 이미 유럽에서는 세상에 알려진 사상가의 이름으로 된 아키브를 많이 찾아볼 수 있지만, 국내에서는 변선환 아키브가 그 처음이다. 이찬수(40·변선환 아키브 소장·강남대) 교수는 변선환 아키브를 열게 된 계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변 교수님이 교회에서 물러나실 때 이단시되었고, 사상이 너무 선진적이었던 문제로 그 사상이 교계에 제대로 소개되질 않았습니다. 또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라 불릴 만큼 해박하셨던 변 교수님은 그만큼 소장하고 계신 책도 많았죠. 교수님이 타계하신 후, 제자들과 유족들은 어떻게 하면 그분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면서 무언가를 할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그러다가 교수님의 사상을 기리고 장서를 활용하며 계속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아키브를 여는 것이 좋겠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키브는 여태까지 총 7권의 <변선환 유고집>을 출간했다. 변 교수의 논문, 강연문, 미간행 수고를 정리한 유고집에는 온 힘을 다해 연구했던 그의 사상이 잘 드러나 있다. 이 외에 단행본은 그를 가까이서 지켜 본 제자들이 변 교수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는 다수의 논문이 실려 있다. 지난 6년 간 적지 않은 책을 출간해 온 아키브에서 최근 하고 있는 작업은 그의 설교를 정리하는 일이다. 작은 메모로 혹은 완성된 설교문으로 남아 있는 그의 설교를 묶어 설교집으로 출간하기 위해서다. 명쾌하게 가슴을 울리는 설교로도 잘 알려진 변 교수의 설교를 책으로도 만나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변 교수의 업적을 책으로 출간하는 일 외에 하고 있는 것은 월례연구모임이다. 변 교수의 제자이자 아키브를 여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해 온 이정배(감신대) 교수, 한인철(연세대 교목) 교수, 심광섭 교수, 이종찬 교수, 송성진 교수 등 20여 명의 후학들이 모여 갖는 연구모임이다. 한국의 신학자, 사상가, 토착화와 관련한 문제, 종교신학, 종교간의 대화 등 생전에 변 교수가 중점적으로 연구했던 부분과 더 나아가 한국 신학을 정리하는 깊이 있는 연구를 하고 있다.
활동 범위의 확대―동서종교신학연구소
 그러나 6년 간 지속돼 온 월례모임이 의미있고 활발한 모임이었음에도 아직 못다한 아쉬움이 있었다. 그것은 그 연구의 결실들을 대중들과 함께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유고집 출간 등 나름대로 활발한 활동을 했고, 연구모임도 활발했지만, 못내 아쉬운 점이 있었어요. 그것은 일반 평신도들과 함께 그 연구들을 공유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는데요. 그것은 아키브라는 한정된 성격 때문이기도 했죠. 그래서 과감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작년 변선환 아키브에는 다른 이름의 연구소가 생겼다. 동서종교신학연구소. 같은 연구원들이지만 하는 활동의 폭은 넓어졌다. 여기서 ‘동서'라는 말은 동양과 서양, 모든 종교를 아우른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쓰였다. 따라서 동서양의 종교의 경계를 넘어선 종교신학에 대한 연구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에 적을 두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교회가 속 시원히 대답해 주지 못하는 내용들, 교회 비판적이면서도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의 신앙의 기초를 다질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현재는 교회가 할 수 없는 그런 명쾌한 토론의 자리들을 만들기 위해서 준비하는 중이에요. 벌써 몇 차례 모임이 있었는데, 곧 열리게 될 겁니다. 연구소를 개설한 중요한 뜻은 변 교수님의 뜻을 기리고 학문적 업적을 살리기 위해서 그 연구의 폭을 더욱 넓힐 필요가 생겼다는 거죠. 또 변 교수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오해들을 풀고 교회에 한층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 말입니다. 변 교수님의 정신을 살려 대중들에게 알리고 함께 깨어 있는 신학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동서종교신학연구소가 설립된 의의라고 할 수 있을 거에요."
한국 교회에 한 획을 그은 신학자 한국 교회에 한 획을 그은 신학자, 변선환. 그가 생전에 이루어놓은 학문적 업적과 사상은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하다. 그러나 그의 앞선 사상과 열정이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한국 사회와 교회의 풍토에서 그는 ‘이단자'였지만, 가르침을 받았던 많은 후학들에게 그는 더 없는 스승이요, 선각자다. 그렇기에 비록 거창하거나 빛나는 움직임은 아니지만, 그의 정신을 잇고자 뒤를 따르는 제자들은 변선환 아키브를 통해 다시 그를 살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이 그를 기리고 기억하는 것은 단지 그 사상의 광대함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생전에 보여주었던 학문에 대한, 그리고 신앙과 신학에 대한, 제자들을 사랑했던 모습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아키브의 소장을 맡고 있는 이찬수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아키브를 통해 변 교수님을 기리고자 하는 것은 신학사상의 위대함, 업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10년에서 20년 가까이 앞선 신학사상을 한국에 들여왔고, 그것이 너무 선진적이기에 받아들일 수 없었던 풍토… 참 가슴 아픈 일이죠. 하지만 그를 스승으로 받들고 기억하는 것은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닙니다. 너무나도 제자를 사랑했고 학문을 사랑했으며, 감리교를 사랑했던 한 사람. 변 교수님은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앞으로는 변 교수님의 학문과 사상, 업적뿐 아니라 그가 왜 존경을 받고 기억할 수밖에 없는 분인지, 왜 참된 스승이 되는지에 관해서도 알리는 작업들을 하고 싶습니다."
김진아 기자 nebo@cnews.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