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천적 상한심령의 종류
열등감, 죄책감, 소외감
선천적 상한심령 곧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상한심령의 종류를 창세기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원죄로 인한 상한심령입니다. 우선 열등감이 있습니다. 창세기 3장 7절입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7절에는 죄를 지은 후 인간이 취한 첫 번째 반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악의 결과 자신들의 눈이 밝아지자 자신들의 벗은 몸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끄러워했으며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나뭇잎으로 자신들의 벌거벗은 몸을 가렸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원죄가 열등감을 만들어내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상한 심령의 하나가 바로 열등감입니다. 자신을 바라보며 부끄러워하는 아픔이 열등감입니다.
인간은 원래 열등한 존재, 곧 피조물입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열등한 것이 아니라 죄를 짓기 전에도 피조물이었으며 스스로의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즉, 누군가를 의존해야만 하는 존재였습니다. 피조물이라는 의미는 창조주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의미를 넘어 창조주를 의지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죄를 짓기 전에는 원래 자신의 열등함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자신이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벽했기에 모든 것이 풍족하였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것은 갓난아기가 어머니 품 안에서 엄마의 젖꼭지를 물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갓난아기가 어머니 품속에 있을 때, 자기가 열등하다고 불평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갓난아이는 엄마의 품에서 매우 행복해 합니다. 부족을 모르고 지냅니다. 실제로는 너무나 부족한 존재인데도 말입니다. 너무나 행복해 합니다. 그러나 갓난아기는 어머니의 품으로부터 떨어질 때 불안해서 자지러지게 울며 자신의 열등함을 울음으로 호소합니다. 자신의 부족을 알아달라고 웁니다. 나를 보살펴 달라고 울어댑니다. 실제로 엄마의 품을 떠난 갓난아기는 이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연약하기에 혼자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갓난아기의 행복은 엄마의 젓꼭지를 빨고 있을 때입니다. 그 순간이 가장 편안한 순간입니다. 이것이 에덴동산에서의 인간의 처음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벽했을 때의 인간의 모습입니다. 모든 것이 부족하지만 모든 것이 완벽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런 의미에서 10개월 동안 엄마의 뱃속에서 편안히 자라던 아이가 세상에 나올 때, 왜 우는지를 아시겠습니까? 엄마의 뱃속이 가장 편안해서입니다.
열등감이란 피조물로서의 자신을 발견할 때 생겨나는 상한 심령입니다. 창조주와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알게 될 때 가지는 상한 감정입니다. 열등감을 가지는 배경에는 분리와 자기 자신을 보는 것, 그리고 상대방과 비교하는 비교의식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열등감이 생기는 이유를 외부나 환경에서 찾습니다. 예를 들어, 남들에 비해 공부를 못한다던지, 집안이 가난하던지, 키가 작던지 하는 등등의 이유에서 열등감을 가집니다. 이처럼 열등감은 비교될 때 생기는 상한마음이기는 하지만 근원적으로는 하나님과의 분리에서 생기는 상한 심령임을 기억하십시오. 즉, 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죄가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어 자기 자신을 의식하기에 생기는 아픔입니다. 우리의 눈이 하나님을 향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나 주변 환경을 향해서 밝아졌을 때 생겨나는 원초적 감정 중 하나입니다.
따라서 열등감은 환경이나 외부적인 조건을 바꾼다고 해서 치유되지 않습니다. 근원적인 면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을 통해 치유가 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실제로 살기 시작해야만 없어지는 상한 심령입니다. 열등감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갓난아기처럼 다시 하나님의 품에 안기면 됩니다. 주님의 사랑을 확인하기만 하면 자연히 치유가 일어납니다. 환경이 하나도 바뀌지 않아도 관계없습니다. 신체장애가 더 이상 열등감을 조장하지 못할 것입니다. 키가 작은 이유로 더 이상 위축되지 않을 것입니다. 가난이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학벌이 좋지 않은 그것이 더 이상 아픔이 아닐 것입니다.
선천적 상한심령의 두 번째 종류는 죄의식입니다. 창세기 3장 8절부터 10절 말씀입니다.
[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 3:8-10)
열등감이 생긴 아담과 하와는 어떻게 행동했나요? 그들은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죄의식이 생겼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때에도 자기 자신을 알게 되면 두려운 법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무능하고 연약한 피조물인가를 알아도 그런데 아담과 하와의 경우 죄까지 지었으니 얼마나 죄책감이 컸겠습니까? 죄의식이란 죄를 지었다는 자책감을 말합니다.
열등감은 수치심으로 발전하여 치마를 만들어 입게 만들었습니다. 나뭇잎으로 수치스러움을 가렸으나 자꾸만 커지는 죄의식으로 아담과 하와는 숨을 곳을 찾게 됩니다. 그들이 몸을 숨겼다는 것은 한 편으로 마음을 숨겼다는 말도 됩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간 것입니다. 죄의식은 자꾸 도망가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선천적 상한심령의 세 번째 종류에 ‘버림받은 마음’즉 소외감이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6절부터 19절을 읽어 주십시오.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 3:16-19)
아담과 하와에게 고통이 임했습니다. 남자에게는 땀을 흘려야 하는 고통, 여자에게는 해산의 고통과 남자를 사모해야만 하는 아픔이 찾아왔습니다. 땅과 짐승들이 인간에게 저항하고 자연이 이제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왜소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열매를 따먹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인간은 이때부터 피곤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여기다가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내어 쫓기며 버림당합니다. 여기서 소외감 곧 버림받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기억하실 사항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버리신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인간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십자가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까지 인간과 함께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배려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실 때 아담과 하와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아마 무지하게 놀랐겠지요. 앞이 깜깜했겠지요. 무서운 생각이 들었겠지요. 여러분, 인간의 가장 큰 고통이 무언지 아십니까? 그것은 자신이 홀로 된다는 인식입니다. 즉, 버림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나 혼자 끼어들지 못했을 때를 경험해 보셨습니까? 소위 왕따를 경험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아마 그 때 당한 소외감이나 외로움은 말로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기억에서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왜 인간들이 열심히 사는 지 아십니까?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의 무리에 끼어있고 싶어서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일류대학생 무리에 낍니다. 사실 일류대학에 진학하고 안하고 하는 문제는 인생을 살며 그리 큰문제가 아닌데도 말입니다. 왜 인간들이 항상 긴장하며 살고 있는 지 아십니까? 사람들이 자기를 버릴까봐 그렇습니다. 무시당할까봐 비난당할까봐 항상 긴장합니다. 물론 다는 아니겠지요. 그러나 그런 긴장의 배후에는 소외감이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인간은 사람들 속에서 중심이 되고 싶어 합니다. 개인의 야망 중 하나가 바로 스스로 세우고자 함입니다. 요즈음 브랜드 아파트 광고가 대중을 이루고 있습니다. 자기네들 브랜드의 아파트에 살면 품격이 올라가는 것처럼 광고하면서 소비자들을 현혹시킵니다. 사실은 소외감을 숨기는 수단일 뿐인데도 말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 욥이 있습니다. 그는 고통과 인내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욥은 고백합니다. 모든 고통은 다 참을만하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정작 참을 수 없는 것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들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신 것이라는 인식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시면 견딜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시지 않았다는 확신만 있다면 어떠한 고통도 견뎌낼 수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를 했지만 여전히 속이 불안했던 경험을 하신 분이 여러분 중에 있을 것입니다. 한두 번쯤은 경험하는 일입니다. 왠지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 같은 생각으로 괴로워해 보신 적은 없으십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경우에서 버림받는 아픔이 무언가를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속의 버림받은 마음 곧 소외감을 치유하시기 위해 그분이 먼저 버림을 받으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33년 동안 사시면서 많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수많은 풍파를 겪으셨던 것입니다. 나중에 주님은 한 제자로부터 버림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곧 바로 다른 나머지제자들에게서도 배반을 당합니다. 그러나 주변의 사람들이 자신을 버리고 배반할 때에도 주님은 참 잘 참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주복을 끄는 구절 하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소리치신 내용입니다. 마태복음 27장 46절에 나옵니다.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 27:46)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 고통의 절정에 주님께서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소외감이 있음을 봅니다. 모든 고통을 고통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모두 극복하셨던 주님이신데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을 때에는 너무나 고통스러워 하셨습니다. 아,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과의 친밀함에서 멀어질 때 주님이 당하셨던 고통을 느낄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현재와 같지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와의 완벽한 친밀함 속에 사셨던 주님이셨기에 인간의 죄악을 대속하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버림받으시며 울부짖던 장면은 우리 머릿속에 영원히 기억될 장면입니다.
주님이 그러하셨다면 처음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을 때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바로 이 버림받은 마음을 치유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러분, 만일 우리가 버림받은 마음 곧 소외감을 치유하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속 도망을 하게 마련입니다. 입술로는 “믿습니다.”를 연발할지모르지만 마음에는 불신이 가득 차오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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