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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역경의 열매, 북한 최고의 배우에서 선교사로...주순영의 드라마틱한 간증글 01-16회

에스더2381 2010. 5. 3. 12:12

[역경의 열매]

(1)중국 출장길 받은 성경책 내 삶 신앙의 길로 이끌어

[2008.03.20 18:29]

 

가끔 "매니저가 없습니까?"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럴 때마다 한참을 망설이게 된다. 실제론 없지만 꼭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기독교 방송뿐 아니라 일반 방송에도 가끔 출연하기 때문인 듯하다. 지금까지 KBS의 '피플 세상속으로' '인간극장' '남북의 창', MBC의 '화제집중' '뉴스투데이' 등 숱한 프로그램과 일본의 여러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그런데 사실 내게 매니저가 있었다면 한때 그렇게까지 망가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대한민국에 와서 지낸 처음 3년간 생활은 너무나 아프고 쓰려서 필설로 표현하기 어렵다.

"북한 1호 공훈배우… 김정일 엄마가 벗었다!"

2004년 스포츠신문과 연예뉴스 등에선 내 누드사진 촬영을 다룬 기사를 내보냈다. 자본주의 대한민국에서 속고 농락당한 한 탈북 여성의 억울한 사연은 쏙 뺀 채 선정성만 오롯이 내세웠다. 비난과 조언들이 쏟아졌다. 잊을 수 없는 악몽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었다.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처럼 무섭게 휘몰아쳐오는 태풍의 한가운데서 주님은 나를 만나주셨다. 그분은 절망의 끝자락에 선 내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주셨다.

다른 사람들뿐 아니라 나도 내 인생이 끝난 걸로 알았다. 지워진 멍에가 너무도 힘겨워 세 번씩이나 한강으로 뛰쳐나가야만 했다. 그때마다 불빛에 비치는 한강의 물줄기에 어른거리는 가족의 얼굴들을 보았다. 2급 장애인으로 대소변을 받아내야만 하는 어머니, 역시 2급 장애인으로 거동이 불편하신 아버지, 고3으로 대학 입시를 준비하고 있는 아들 철이, 아직 북한에 두고 데려오지 못한 사랑하는 딸 영아….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 생존의 이유들이었다.

누드 사진을 찍었다는 이유로, 아니 찍혔다는 이유로 예정됐던 집회들이 모두 취소됐다. 그러나 이내 그 이면의 안타까운 사연이 전해지면서 새롭게 요청이 밀려들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해매던 나는 다시 태어난 심정으로 하나님을 만난 기적의 간증을 하기 시작했다. 조금씩 고통을 잊을 수 있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느껴갔다.

내 인생 이야기를 세 토막으로 나눠 알리고자 한다. 먼저 북한을 떠나 중국에서 겪었던 고통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중국편을 말하려 한다. 그리고 중국에서의 3년 못지않게 힘든 시간을 지낸 뒤 하나님 안에서 성숙해간 이야기를 그린 한국편을 밝히고, 마지막으로 북한 김일성 주석 체제의 권력 핵심부에서 겪었던 18년 동안의 북한편을 그려나가겠다.

중국편에서는 중국 출장길에서 무심코 받은 한 권의 성경책 때문에 간첩으로 몰려 되돌아갈 수 없게 된 데서부터 3년 동안 중국 땅에서 사선을 넘나들며 체험했던 전능한 하나님의 기적들을 담는다. 한국편에서는 대한민국에 입국한 뒤 자본주의 적응과정에서 겪은 갖가지 에피소드와 그 이면에서 역사하신 신실하신 하나님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북한편에서는 16세에 공산당의 부름을 받아 권부의 핵심에 들어가 김 주석 사후 호위사령부 소좌(소령)로 군복을 벗기까지의 이야기를 담는다.

나는 내 인생을 감히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여주기에 더없이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북한 1호 공훈배우 주순영이 만난 하나님 이야기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분의 진정한 마음을 전하고자 한다.

나는 이제 누가 매니저가 있느냐고 물으면 "내 매니저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라고 분명히 말한다.

정리=정수익 기자
sagu@kmib.co.kr


누구인가

1960년 함경북도 회령 출생. 1976년 호위사령부 협주단 배우 데뷔(대위). 1979년 1호 공훈배우 칭호 받음. 1983년 호위사령부 소좌(소령) 임관. 2000년 무역지도원으로 중국 출장 중 예수님 영접. 2003년 대한민국 입국. 2005년 아세아연합신학대학 전문인 선교과정 수료, 현재 재학 중.

 

(2) “최고 배우 왔다” 노래 간청 中 호텔서 우연히 즉석공연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북한은 심각한 경제난에 빠졌다. 수많은 백성들이 굶어 죽어갔다. 외국의 투자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나는 중국 옌볜지역 자본가들의 북한 투자를 유치하라는 당의 특명을 받고 3일간의 출장길에 올랐다. 그런데 그 출장길이 영원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길이 될 줄이야….

중국 옌볜의 한 호텔에 안내를 받아 여장을 풀었다. 그런데 그 호텔 식당의 여주인이 날 어떻게 알았는지 북한 최고의 배우가 왔다며 노래 한 곡만 불러 달라고 청했다. 아무 생각 없이 '반갑습니다' '휘파람' 등 서너 곡의 북한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예상 밖의 반응이 나왔다. 너도 나도 몰려와 악수를 청하고 사진을 찍어대고 꽃다발을 안기는 것이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과 김정일 오직 두 사람만이 생화를 받는데, 중국 땅에서 생화 꽃다발을 한아름 받았다. 사양했지만 그들은 극구 안겨줬다. 거기다 돈까지 쥐어주었다. 한쪽에 앉아 있던 점잖아 보이는 손님들이 다가와서 쥐어준 것은 이상한 모자를 쓴 할아버지가 그려진 돈이었다. 중국 인민폐나 달러, 일본 엔화는 보았지만 그런 돈은 난생 처음이었다.

"안녕하세요. 우린 남한 사람들입니다. 이건 남한 돈이고 돈에 그려진 인물은 세종대왕입니다. 그냥 음료나 한잔 사 드세요. 그리고 저, 혹시 하나님을 모르시죠?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오늘 받은 팁에서 10분의 1을 하나님께 십일조로 바치면서 기도하면 두 배로 부풀려서 축복하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이건 나중에 방에 들어가서 열어보세요."

그날 나는 수고한 대가로 받는 돈을 '팁'이라고 부른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남한 사람들을 만나 '하나님'과 '십일조'라는 말을 들었고, 예쁘게 포장된 선물까지 받았다. 방으로 돌아와 손님들로부터 받은 돈을 세어보니 중국 돈 2700위안이었다. 2000년 당시 호텔 식당에서 일하는 여종업원들의 한 달 월급이 500위안 정도였으니, 그날 나는 노래 몇 곡 부르고 무려 다섯 달 월급을 받은 셈이었다.

어느새 나의 작은 가슴은 쿵쾅거리고 있었다. 낯선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낮에 남한 손님들이 말한 십일조가 떠올라 호기심에 300원을 따로 떼어놓았다. 또 하나 중요한 일이 있었다. 선물을 개봉하는 일이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하며 예쁜 포장지를 벗겼더니 시커먼 가죽 가방이 튀어나왔다. 가방 옆은 지퍼로 채워져 있고 앞면에는 금박으로 무슨 성경이라는 이름이 찍혀 있었다.

'아∼돈 가방이구나. 얼마나 많은 돈을 넣었으면 이렇게 무거울까? 달러일까, 엔화일까, 아니면 남조선 돈일까?'

조심스럽게 지퍼를 열었다. 돈이 아니라 책이었다. 돈이 아니라 조금 서운했지만 옆면이 금박으로 칠해진 것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북한에도 '김일성 주체사상'이나 '김일성 혁명활동 약력' 같은 서적은 가죽 표지로 되어 있다.

책 표지를 들춰보니 '주기도문' 과 '사도신경'이라 쓰여 있었고 마지막 표지 안쪽 면에는 '십계명'이 적혀 있었다. "제일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제이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북한의 '10대 원칙'과 흡사했다. "제일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밖에는 그 누구도 모른다는 확고한 입장과 관점을 가져야 한다. 제이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를 충성으로 높이 우러러 모셔야 한다…."

'남조선 사람들은 아주 질이 좋지 않구먼. 어쩜 우리 10대 원칙을 가져다가 김일성 동지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하나님으로 바꿔놓다니?' 내일 남한 사람들을 만나면 단단히 따지기로 마음먹었다.

 

(3) 3일 연속 즉석공연… 팁 쏟아져 받은 대로 교회 십일조

 


중국 출장 둘째날, 일어나자마자 ‘십일조’라는 말이 뇌리에서 맴돌았다. 현지 안내원을 찾아 십자가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달라고 했다. 택시를 불러 타고 교회로 안내되어 갔다. 문을 힘차게 두드렸다. 한참만에 나이 든 중국동포 아저씨가 문을 열고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빨리 문 좀 열어주시라요. 십일조 바치러 왔습네다.”

“북조선 사람 같은데, 거기 사람도 십일조를 함까?”

“그딴 건 물을 것 없구, 빨리 하나님 있는 곳으로 데려다 주시라요.”

건물 안은 컴컴해 잘 보이지 않았다. 아저씨는 헌금함을 가리키며 그곳에 넣고 그냥 가란다. 나는 하나님께 직접 바치고 가겠다며 우겼다. 아저씨와 한동안 승강이를 벌이다가 오래 지체할 수 없어 헌금함에 준비해온 돈을 넣고는 전날 식당에서 한국 손님들이 일러준 대로 기도를 하고 돌아섰다.

밖으로 나와서 아무래도 마음이 안 놓였다. “하나님, 저 아저씨가 수상하니 얼른 챙기세요.” 별도로 기도까지 하고 힘들게 발길을 돌렸다. 낮 동안 중국 무역상들을 만나 면담을 잘 하고 저녁 무렵 숙소로 들어갔다.

“아이고, 선생님을 계속 기다렸습니다. 오늘도 노래 몇 곡만 불러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호텔 식당 여주인은 내가 나타나자 반색을 했다.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었다. 전날 난생 처음 생화 다발에 거금을 받았던 터라 내색을 하지 않았을 뿐, 나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여성은 꽃이라네’ ‘도시처녀 시집와요’ ‘심장에 남는 사람’ 등을 불렀다. 소문이 났는지 식당은 만원이었다.

방으로 돌아와 팁으로 받은 돈을 세어보니 4800위안이었다. 첫날의 거의 배였다. 십일조를 바치면 하나님이 배로 부풀려준다는 말이 적중했다. 십일조를 하기 위해 500위안을 따로 떼어놓았다. 다음날도 날이 새자마자 교회로 달려갔다. 한번 재미를 본 나는 더욱 욕심이 생겼다.

“하나님, 배로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내일이면 출장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돈을 10배, 아니 100배로 부풀려 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또 다시 적중했다. 그날 저녁에는 손님들이 예비 좌석에다가 문밖에까지 진을 쳤다. 너도 나도 뒤질세라 팁을 주었다. 무려 3만6000위안이라는 거금이었다. 당시 중국에서 방 3개에 화장실 2개 딸린 고급 아파트를 두 채나 살 수 있는 큰돈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3600위안을 들고 바로 교회로 갔다.

“내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은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이 돈을 받으시고 다음번엔 세 달 출장을 오게 해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꿈같은 중국 출장을 마치고 고향땅을 향했다. 그런데 중국 세관에서 검사를 받는 도중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선생님, 빨리 피하시라요. 지금 북조선 쪽 세관에 보위부 체포조가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슴다.”

누군가가 전해주는 귓속말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내가 남조선 안기부와 접촉해서 국가기밀을 넘겨주었다는 것이다. 빨리 그 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땅히 갈 곳이 없어 달려간 곳이 교회였다. 십자가 앞에서 목놓아 울었다. 사흘이 아니라 석 달 출장 오게 해달라던 나의 기도마저 들어주셔서 아예 석 달이 아닌 영원한 출장길이 되게 해버린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다시 가족을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터지는 것 같았다. “여호와여 내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라는 다윗의 고백 그대로 뼈가 떨리는 듯했다.

 

(4) 가족과 생이별… 조선족 행세 식당 인수해 탈북여성들 고용

 

졸지에 간첩으로 몰려 중국 도피생활을 시작했다. 가족과 생이별한 고통을 견딜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교회로 찾아가 두 손을 모으는 습관이 생겼다. 기도라기보다는 애곡이고 통곡이었다. 하루는 혼자서 소낙비처럼 눈물을 쏟으며 하나님을 부르던 중 갑자기 영감이 떠올랐다. '우선 중국 조선족 신분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얼굴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체하지 않았다. 안내인을 통해 조선족 호구를 샀다. 그리고 성형병원을 찾아가 의사에게 무조건 얼굴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해달라고 했다.

그런 가운데 차츰 마음에 안정이 찾아왔다. 교회에서 신앙생활의 기본도 조금씩 익혀갔다. 그러면서 최근 나를 중심으로 일어난 일련의 일들에 특별한 뜻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남한사람들과의 만남, 선물로 받은 성경책, 세 번이나 교회에 찾아가 십일조를 바친 일, 그것이 보고되어 체포령이 내려진 일 등이 예사롭지 않았다.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였다.

또 하나의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어느 날 교회에서 기도하던 중, 불현듯 중국 룽징(龍井)에 살고 있는 사촌동생 집에 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심스럽게 전화를 했더니 북한에 있어야 할 아들 철이가 그곳에 와 있었다. 절대로 북한 땅으로 들어오면 안 된다는 말을 내게 전해주기 위해 부모님이 모험을 시도한 것이었다. 며칠간 철이와 함께 지낸 뒤 사람을 사서 철이에게 돈과 편지를 쥐어 북한으로 보내려 했다. 그러나 그것이 생각처럼 용이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철이를 북한으로 돌려보낼 마음을 접고 중국 소학교에 입학시켰다.

성형수술한 얼굴에 부기가 빠지자 다행히 완전히 달라진 얼굴이 됐다. 자신을 얻고 식당을 하나 인수해 개업했다. 문을 열자마자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들이 밀려왔다. 그때부터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십일조는 제1의 생활준칙이었고, 매일 아침 영업시작 전에 감사기도를 드렸다. 자연스럽게 탈북한 젊은 여성들을 종업원으로 고용했다. 아파트를 구입해서 동생들과 함께 지냈다. 그들에게 하나님 이야기를 해주고 같이 기도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자고 권했다. 모두들 좋아했다.

"언니, 할렐루야라는 말이 무슨 뜻이야?"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한참을 궁리했다. 순간적으로 하나님이 기지를 주셨다.

"'하나님 만세'라는 뜻이야."

"그럼 언니, 아멘은 또 무슨 뜻이야?"

역시 한참을 생각했다.

"'암 그렇구 말구'라는 뜻이야."

우리는 어려운 외국말 대신 '하나님 만세'를 세 번씩 외친 뒤 기도를 시작하고 '암 그렇구 말구'로 마무리했다. 모두 왕초보 신앙생활을 하면서 즐겁고 행복해했다. 당시 중국 교회들에는 북한 보위부 공작원들이 진을 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래서 교회에는 나가지 않고 십일조를 바칠 때에만 내가 비밀리에 교회로 가 직접 전했다. 하루는 기도하던 중 '이름을 바꾸라' 는 메시지가 강하게 들려왔다. 나는 지체 없이 동생들을 모아 놓고 기도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은 하나님의 딸들로 세상에 다시 태어났습니다. 하오니 새롭게 태어난 저희들에게 새 이름을 주시옵소서!"

우리는 '예수님'의 '예' 자를 따서 이름 하나씩을 지었다. 먼저 나부터 앞장서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뜻에서 '예선' 이라고 하고, '예정' '예진' '예심' '예림'이라고 의미있는 이름 하나씩을 지었다. 주님 안에서 거듭난다는 것의 의미도 잘 모르는 우리들이었지만 모두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새 이름에 만족해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느샌가 깨닫기라도 한 것이었을까.

 

(5) 식당 급습 공안에 붙잡혀 벌금내고 석방후 또 체포돼

 


"쾅 쾅 쾅…"

한밤중 누군가가 문이 부서져라 두드렸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동생들과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을 죽였다.

"위생비 받으러 왔어요!"

동생들에게 아무 소리도 내지 말게 한 뒤 신발들을 모두 신발장에 집어넣고 잠옷 바람에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을 여는 순간,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듯했다. 여자 한 명과 세 명의 공안이 서 있었다. 심장이 쿵쿵거리고 다리가 부들거렸지만 애써 태연한 척했다. 그들을 잠깐 기다리게 해놓고 돌아서자 "하나님, 살려주세요"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그래, 죽더라도 나 혼자 죽자. 동생들까지 다 죽일 수는 없어…."

동생들을 옷장 안에 들어가 숨어 있게 했다. 한동안 꼼짝하지 말라고 다짐하고는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경찰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공포에 넋이 나간 상태에서 중국 공안들의 억센 팔에 떠밀려 차에 실렸다. 차는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어디론가 달렸다. 중국 공안에 붙잡힌 건 분명한데, 북한과 관련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나님 아버지, 제발 저를 살려 주시옵소서!" 주문처럼 반복해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리고 아파트에 남아 있는 동생들이 빨리 안전한 곳으로 도망가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끌려간 곳은 '북부 공안지구대'라는 곳이었다. 지구대 대장 방으로 끌려갔다.

"북한에서 무슨 임무를 받았는가? 북한 공작원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겁도 없이 김일성 찬양 노래까지 부르면서 떳떳하게 식당 영업을 할 수 있는가?"

북한과 관계 없는 체포였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조사가 진행되는 내내 기도하면서 지혜를 구했다. 3시간여 동안 실무자에게 조사를 받은 뒤 지구대 대장이라는 사람에게 인계됐다. 그런 가운데 문득 새로운 카드를 꺼내라는 마음이 들었다.

"저, 대장동지! 벌금을 하라는 대로 다 하겠으니 제발 북한으로만 보내지 말아주십시오."

대장은 잠시 나의 눈을 응시하는가 싶더니 아래 위를 훑어보았다.

"돈이 많은 모양이지? 벌금은 얼마를 할 수 있어?"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나 스스로도 놀랐다. 어느새 내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넘쳐났다.

"5000위안 할 수 있어?"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액수가 너무 적었다. 건물 주인에게 전화를 했더니 1시간쯤 지나서 5000위안을 직원을 통해 보내왔다. 돈을 받아든 대장은 얼굴빛이 환해지더니 벌금 냈다는 말을 아무에게도 해서는 안된다고 거푸 다짐을 받았다. 그리곤 다시 잡히지 말라며 내보냈다.

밖으로 나와 택시를 탔다. 교회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배당 안에 들어가 맨 앞으로 달려가서 십자가 앞에 풀썩 주저앉았다.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아버지 하나님,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넓고 넓은 중국 땅에서 우리가 마음놓고 살아갈 곳이 없습니까? 저와 동생들을 지켜주시옵소서."

한동안 통곡하며 기도하자 마음이 평안해졌다. 아파트로 돌아가니 동생들은 아직도 새파랗게 겁에 질려 있었다. 서로 끌어안고 한동안 눈물을 쏟아낸 뒤 우리는 하나님께 마음을 모아 기도했다. 우리가 기댈 데라곤 하나님밖에 없다는 공감대가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다시 식당 문을 열었다. 영업이 불티나게 잘 됐다. 여전히 십일조는 어길 수 없는 우리의 생활준칙 제1호였다. 불안감 속에서 지내던 어느 날, 기어코 일이 터졌다. 이른 아침 영업 준비를 위해 혼자 식당에 나가 있는데, 사복 차림의 남자 3명이 들어오더니 조사할 것이 있다면서 다짜고짜 끌고 갔다. 자그마한 지구파출소에 도착해 북한 주소와 이름 등 몇 마디를 묻고는 다시 차에 태워 끌고갔다. 내 신세가 너무 억울해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6) 中 감옥 속 탈북 수감자들 북송 공포·성폭력에 처참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북한으로 이송되면 어떻게 될까?’

중국 옌지의 감옥을 거쳐 북한의 무산이 가까운 변방부대 감옥으로 옮겨왔다. 작은 감방 안에는 20여명의 여인들이 수감되어 있었다. 그 중에는 아이들과 임산부도 끼여 있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감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그러다 간간이 훌쩍이거나 탄식의 소리가 새어나왔다.

“이렇게 북송되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떨리는 목소리로 한 여인이 물었다.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런 조사와 고문을 받아야 하오. 나는 두 번씩이나 북송되어 간 경험이 있는데, 이번엔 틀림없이 죽일 게요.”

다른 한 여인은 이렇게 말하고 훌쩍이기 시작했다. 여인의 입에서 나온 증언들은 너무나 끔찍해서 절로 소름이 돋았다. 증언에 의하면 생머리를 뽑고, 무자비한 발길질로 임신한 여자를 낙태시키는 등 필설로 표현하기 어려운 생지옥이었다. 중국 감옥에서의 고문도 끔찍했다. 그런 중에 북송이 돼서도 돈이 있으면 살 수 있다는 말이 나왔다. 팬티 속에 숨겨둔 300위안을 소중히 챙겼다. 옌지 감옥에서 그랬던 것처럼 기도해야 한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한동안 눈을 감고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는 조용히 눈을 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에스더처럼 살자!”

벽에 두 개의 글귀가 쓰여 있었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누군가가 벽에 글을 써놓았다. 너무나 반가워 가까이서 확인하려고 하는데 금방 글귀가 없어졌다. 내 눈을 의심했다. 사라진 글의 내용을 또렷하게 마음속에 새겼다. 마음속에 감격과 기쁨이 밀려왔다. 하나님께서 위로해주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로 감사기도가 나왔다.

그런 가운데 북한 보위부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기독교인이라는 정보도 들었다. 기독교인은 발견 즉시 총살이라는 것이다. 그걸 알고부터는 아예 기도하는 티조차 내지 않았다. 이후 그 감옥에서 지낸 한 달 동안 눈을 뜬 채 마음속으로만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생활했다.

감옥에는 열일곱살 되는 소녀가 있었다. 잡혀 들어온 지 6개월이 지났단다. 얼른 보기에도 정상이 아니었다. 한참 지나서 그 소녀의 사연을 알았다. 그는 13세 어린 나이에 굶주림을 못 견뎌 탈북했다가 중국의 인신매매범에게 붙들렸다. 그리곤 그에게 강간당하고 몽골 인근의 시골로 팔려가 3년 동안 굶주림과 함께 홀아비 아버지와 여섯 아들에게 매일 돌려가며 성노리개로 유린당하다 감옥에까지 끌려왔다. 그런 과정을 겪으며 정신이 온전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감옥의 여인들은 탈북한 뒤 저마다 기구한 사연들을 가졌다. 감옥으로 실려오면서 창살이 쳐진 차창 밖으로 초라한 행색의 ‘꽃제비’라 불리는 소년들을 숱하게 볼 수 있었다.

예쁘장한 처녀 한 명이 들어왔다. 그녀도 역시 인신매매범에게 팔려갔다가 붙잡혀 들어왔다. 하루는 감방 근무병에게 불려 나갔다. 한참 만에 그 근무병에게 군홧발에 차여 다시 들어온 그 처녀는 처연하게 울었다. 강간을 당한 것이다. 그들에게 우리는 모두 인간이 아니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좁은 감방에서의 생활부터 그랬다.

나중에 옆방에 수감된 남자들의 사연은 더하다는 걸 알았다. 가장으로서 가족을 데리고 탈북, 힘든 노역에 갖은 폭행을 견디고 끌려온 사람들이었다. 심지어 자기 아내가 눈 앞에서 중국 한족들에게 희롱당하는 걸 참지 못해 악다구니를 하다 몽둥이로 얻어맞아 불구가 된 이도 있었다. 그런 사연들을 다 쓰려면 수십권의 책으로도 모자랄 것이다. 그런데 이제 나 자신이 그들과 같은 신세가 됐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희망이 있었다. 속으로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

 

(7) 北 송환돼 ‘노동단련대’로 노역하며 짐승보다 못한 생활

 


2000년 6월5일. 내 생애 가장 두려웠던 날이다. 수많은 기도를 했는 데도 북한으로 강제 송환되는 날은 기어코 오고야 말았다. 감옥에 있는 동안 먼저 나가는 이들에게 한 가지씩 벗어주는 바람에 막상 내가 입을 겉옷과 신을 신발이 없었다. 감옥의 간부들에게 부탁해 옷과 신발, 돈을 가져오도록 전화 연락을 했다. 그리고 중국 동포 직원이 시키는 대로 돈을 써서 북한에도 나름대로 공작을 했다. 우리를 태운 트럭은 칠성세관 무산세관을 통과해 두만강 다리를 지나 북한으로 들어섰다. 눈을 감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 이렇게 손에 수갑을 차고 죄인 된 몸으로 북한으로 되돌아 갑니다. 하나님, 이 딸을 살려주시옵소서. 저들이 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해주시옵소서…."

미리 돈으로 공작을 한 것이 효과를 보았다. 하루 종일 보위부와 안전부에서 조사를 받는 중에도 내 신분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나에 대한 조사는 특별대우로 진행됐다. 처음엔 돈의 위력이라고 여겼으나 이내 하나님이 함께해주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감사한지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렸다.

'노동단련대'라는 곳으로 끌려갔다. 이전에 옌지와 화룡 감옥에서 같이 있었던 낯익은 얼굴들이 있었다. 그곳의 생활 역시 도저히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식사 잠자리 등 모든 생활이 짐승의 것만도 못했다. 심지어 대변을 보고도 닦을 게 없어 그냥 지냈다. 나는 속옷을 몇 조각으로 잘라서 빨아가면서 종이 대신 사용했다.

거기다 하루 종일 힘든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여름 땡볕에 얼마나 걸었는지 발바닥에 물집이 생겼다가 터져 피가 났고 그 상처로 흙과 모래가 들어가 엄청난 고통을 주었다. '노동훈련'으로 '사상개조'를 한다는 명분이었다. 말 그대로 짐승보다 못한 생활이었다.

"나는 김일성 주석이 하사한 1호 공훈배우로 보위부 대좌 출신이요. 그리고 무역투자 유치를 위해 중국에 갔다가 잘못된 정보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소."

너무 어렵고 힘든 생활에 죽든 살든 차라리 내 신분을 밝혀버리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그럴 순 없었다. 그 이후의 상황을 너무나 명백하게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극한 상황에서 기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도 기도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런 중 어느날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에 내 귀를 의심했다.


빈들에 마른풀같이 시들은 나의 영혼
주님이 허락한 성령 간절히 기다리네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생명 주옵소서….


분명 찬송가 172장이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옆의 동료에게 물었다.

"동무, 저 노래 언제 나온 거요?"

"아니, 저 노래 나온 지가 몇 년 됐는데, 동무는 모르오?"

"아, 그래요? 어디 노래 한번 불러보오."

옆의 동료는 내 요청에 조용히 노래를 불렀다. 다시 내 귀를 의심하였다. '성령'이라는 말과 '주님'이라는 말을 '장군님'으로 가사가 바뀌어 있었다. 중국에서 즐겨 부르던 찬송가 가사의 일부를 바꾸어서 북한에서는 '김정일 장군님 사랑'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 노래를 들으면서 나는 '아, 지금 여기 북한 땅에도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내가 너무 견디기 힘들어 하니 하나님이 나를 위로주시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로소 하나님께 마음 속으로 감사기도를 드릴 수 있었다.

"이 차디차고 캄캄한 북한 땅에도 당신의 사랑이 비치게 해주시옵소서! 그리고 더는 견디기 힘든 이 생활을 면하게 해주시옵소서!"

 

(8) 보위부로 이송 직전 풀려나 새벽 두만강 건너 중국으로

 


노동단련대에서 얼마나 지옥같은 생활을 지냈을까. 마침내 우리를 싣고 갈 기차가 들어왔다. 이제 체념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불법월경 범죄자 60여명이 이름이 불려진 가운데 단 한명, 내 이름만 없었다.

"우리 부장 동지 잘 알아요?"

안전원 대위가 물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친척이오?"

나는 엉겁결에 '네'라고 대답했다. 그는 나를 데리고 안전부 부장 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제서야 이해가 됐다. 얼마 전 부장과 면담했던 것이 주효했다. 그때 부장에게 안전부에서 보위부로 넘어가지 않게 해주면 중국에 가서 많은 돈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었다. 안전부는 한국의 경찰청에 해당하고, 보위부는 국가정보원에 해당한다.

"자, 나는 약속을 지켰소. 이제는 동무가 반드시 약속을 지켜야 하오. 지금 빨리 ○○○로 가면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터이니 그 사람을 통해 안내를 받으시오."

기적이었다. 너무나도 감사했다.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극한 상황에서 잇따라 하나님께 감사기도할 일이 생기니 말이다.

두만강을 건너기로 했다. 부모님과 딸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가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스스로 죽음굴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두만강으로 가면서 명이라는 처녀를 알게 됐다. 우리 둘은 북한 초병의 묵인 속에 새벽 두시쯤 두만강을 건넜다. 무사히 강을 건너 젖은 겉옷을 짜고 있는데 두 명의 남자가 우리 쪽을 향해 달려오며 "꼼짝 마라"고 외쳤다. 말로만 듣던 인신매매범들이었다.

명이와 나는 강옆 풀숲에 엎드렸다. 머리를 바닥에 대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참 있다가 머리를 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바로 앞, 팔만 뻗으면 닿을 만한 곳에 두 남자가 버티고 서 있었다. 그리고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온 몸이 싸늘하게 얼어붙는 듯했다. 두 눈을 감았다. 심장 뛰는 소리와 두만강 물소리만 들렸다. 불과 몇 초가 지났을까, 저쪽에서 '부스럭' 소리가 났다. 두 남자는 "저쪽이다!" 하곤 정신없이 뛰어갔다.

또 다시 하나님께서 지켜주셨다. 진정 하나님께서는 그 위기의 순간에 나와 명이를 지켜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인신매매범들의 눈을 멀게 하셔서 우리를 지켜주셨다.

다시 중국 땅 옌볜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었다. 언제 다시 붙잡힐지 모르는 중국 땅이 무섭고 싫어졌다. 앞길이 막막했다. 언젠가 한국에 간 탈북자가 라디오 인터뷰에서 한국행 루트가 중국 내몽골 변경이라는 한 것을 떠올렸다. 명이와 예림이를 데리고 내몽골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돈 1만5000위안과 옷가지 등 소지품을 챙겨 베이징행 열차에 올랐다. 열차 안에서 몇 차례 검문을 받을 때마다 가슴을 있는 대로 졸여야 했다. 기도, 기도, 그리고 기도…. 마침내 열차는 베이징 역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더 무시무시한 검문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수많은 컴퓨터, 그 앞에 버티고 있는 공안들, 신분증 대조와 호구조사, 중국말 질문…. 피해나갈 구멍이 없었다. 오금이 저려왔다.

무엇보다 컴퓨터가 문제였다. 그 기계는 우리의 가짜 신분증을 금세 들통나게 할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나와 동생들은 손을 잡고 기도했다. 엄청난 인파 속에서 우리는 얼굴이 눈물로 덤벅이 될 때까지 기도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렇게 많던 사람들이 다 나가고 경찰들도 온데간데 없이 없어졌다. 하나님께서 또 다시 우리의 긴급한 기도를 들어주셨다. 참으로 신기하였다. 간절히 기도하면 이루어지는 현상이 놀랍고도 재미있었다. 광야에서 구름과 불기둥으로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보살핌은 이후 내몽골 행 열차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꼬박 이틀을 걸려 내몽골 얼롄(二連)에 도착했다.

 

(9) 택시기사 고발로 中 감옥에… 돈 숨기려 비닐에 싸서 삼켜

 


새벽에 내린 내몽골의 얼롄(二連)은 또 다른 세상이었다. 곳곳의 잔설과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황량함이 중국 땅이되, 완전히 다른 땅이었다. 그 자체만으로 극심한 불안과 공포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중국말을 잘하는 예림이가 앞장서 역 근처 호텔 방을 찾아 들어가 잠깐 눈을 붙였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약속의 땅, 천국의 땅, 자유의 땅, 한국으로 향하는 길을 찾아나서야 했다. 우리는 우리의 길에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굳게 믿기로 했다. 솜옷과 모자, 양말, 장갑 등을 구입하곤 몽금포 관광을 온 조선족 중국인으로 행세하며 택시를 탔다. 돈을 좀 챙겨온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됐다.

그런데 초반부터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몽골로 가는 일일 여행권을 끊어주기로 했던 택시기사의 변심으로 중국 군인들에게 체포됐다. 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만 생각하며 기도했어야 한다고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또다시 북송돼야 한다고 생각하니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심정으로 트럭에 실려 갔다. 눈을 감고 '하나님, 살 길을 열어주세요'라며 기도하는 중에 '내몽고 이련 간수소'라고 쓴 간판이 보였다. 높다란 담장 안의 초라한 건물로 끌려 들어갔다. 바로 몸과 짐 수색을 당했다.

아니나 다를까. 동생들의 옷을 발가벗기자 몸에 감췄던 중국 돈이 와르르 쏟아졌다. 그들도 의아해했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가운데 내 차례가 왔다. 먼저 내 가방을 열어 물건들을 다 꺼낸 그들은 사진첩 속 김일성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고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러자 예림이가 얼른 "이 언니는 북한의 유명한 배우예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나에겐 옷을 벗기지 않고 손으로 더듬기만 했다. 다행히 몸속 은밀한 곳에 숨긴 7000위안을 고스란히 지킬 수 있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방에 수감됐다. '돈이 곧 생명줄'이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던 우리는 7000위안을 지킬 수 있게 해준 하나님께 감사하며 머리를 맞대고 돈을 보관할 방법을 궁리했다. 그런 중에 예림이가 불쑥 "언니, 먹읍시다"라고 했다. 다른 동생들도 맞장구를 쳤다. 그게 가장 안전하다는 의견들이었다.

우리는 100위안짜리 2장씩을 접고 또 접어서 돌돌 말아 비닐 봉지로 쌌다. 손가락 두 마디보다 좀 작은 크기였다. 막상 돈 봉지를 삼켜야 할 것을 생각하니 끔찍했다. 우리는 간수에게 마실 물을 넣어달라고 부탁해 하나씩 목구멍으로 삼켰다. 하나씩 삼킬 때마다 꽥꽥거리면서 토하기도 하면서 그야말로 밤새 고문을 치렀다. 얼마나 물을 마셔댔는지 큰 물통 3개를 비웠다.

역시 무리였다. 돈 봉지를 삼키고 난 뒤 두어 시간 후부터 위경련이 일어났다. 우린 모두 배를 끌어안고 눈물을 쏟아냈다. 그러면서도 탄로날까 봐 소리를 내지 못하고 서로를 위로하면서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다음날부터 우리는 먹은 돈이 몸에서 나오지 않고, 배가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계속 기도했다. 강냉이 빵 한 조각과 절인 무 몇 조각이 아침식사로 들어왔지만 거들떠보지도 않고 기도만 했다.

그러나 생리적인 현상을 어떻게 막으랴. 뱃속에서 신호가 왔다. 감방 안 변기통에 앉자마자 '부르릉 팡팡'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왔다. 난감했다. 한 사람이 변기통에 앉으면 옆에서 "하나님, 제발 소리나지 않게 해주시옵소서"라며 기도했다.

그래도 몇 개씩의 돈뭉치가 나왔다. 동생들은 컵에 물을 따라 대충 씻어서 다시 입에 넣고 삼켰다. 역한 냄새와 삼킬 때의 고통, 정말 사람이 할 일이 아니었다. 나오면 다시 삼키고, 또 나오면 또 삼키고…. 그러기를 수십번씩 하는 동안 일주일이 넘었다.

우리만 있던 감옥에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역시 북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고생에 잔뜩 찌든 상태로 절망감을 한아름씩을 안고 있었다.

 

(10) 만주벌판 가로질러 온 탈북자 옥중서 온갖 인권유린에 신음

 


내몽골 얼롄(二連)의 감옥. 한국으로 가는 시작점에서부터 수많은 탈북자들은 죽음의 늪에 빠져 몸부림치고 있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동족의 슬픔이었다. 연이어 들어오는 그들의 입에서는 무시무시한 말들이 쏟아졌다.

모두가 이런저런 사연을 한 아름씩 안고 잡혀 들어왔다. 시간과 방법은 달랐지만 북두칠성만 보고 가면 몽골 한국영사관으로 갈수 있다는 희망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탈북해 드넓은 만주벌판을 헤매다 잡혀온 사람들이었다.

감옥에서는 갖가지 일들이 일어났다. 높다란 담벼락을 넘어 도주하려다 다리뼈가 부러진 상태서 붙들려온 여인은 발가벗겨진 채 한 겨울밤을 지새야 했다. 감방에서 소란을 피운 다른 여인은 쇠창살에 수갑이 채워진 상태서 스스로 죽기 위해 자기 이빨로 손목 동맥을 물어뜯었다.

"아,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이 절규를 듣고 계십니까? 저희를 살려 주세요! 구원해 주세요!"

기도해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그러나 잘 되지 않았다. '기도가 절실히 필요한데, 기도만 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셨는데….' 표나지 않게 기도하기 위해 나름대로 자신과의 싸움을 벌였다. 가끔 다른 사람들이 깊이 잠들고 난 뒤 혼자서 눈물을 쏟으며 기도했다.

2002년 1월1일,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배가 아파 화장실을 가기 위해 잠깐 감방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갑자기 주위가 캄캄해지면서 돌개바람이 일어나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게 앞을 막았다. 회오리로 모래 기둥이 생기고 기둥 맨 위쪽에는 대낮인데도 휘영청 둥근달이 떴다. 그 달 속에 사람의 얼굴 같은 게 보였다. 순간적으로 하나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른 무릎을 꿇고 앉아서 두 팔 벌려 하늘을 우러러 소리를 질렀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 저희를 보고 계시지요. 저 감방 안에 있는 불쌍한 사람들을 살려주세요. 저들 모두 북송되면 죽을 운명들이옵니다. 구해주세요! 살려주세요!"

이때 귓전으로 '휘익∼' 하는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 같은 것이 지나가면서 묵직한 음성이 들렸다.

"사랑하는 딸아,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들과 함께 있고 너희들을 지켜주리라."

추호도 의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소리쳐 하나님을 불렀다. 누가 보든 말든 마음껏 울분을 토했다. 거의 40일 만에 처음으로 소리 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다시 감방으로 들어가니 모두들 왜 울었냐고 난리를 피웠다.

"자기 옷들 찾아 입어! 오늘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아침까지도 아무 말이 없더니 난데없이 옮겨간단다. 자기 옷과 신발을 찾느라 야단이었다. 그런 가운데서 나와 동생들은 은밀하게 감춰놓은 돈을 급하게 삼켰다. 서로 물을 따라주며 삼키는데, 워낙 다급했던지 돈 뭉치가 꿀꺽꿀꺽 잘도 목구멍으로 들어갔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하루 종일 고물 버스에 실려갔다. 목이 타는데도 물 한방 주지 않았다. 물을 마시면 오줌이 마렵다는 이유에서다. 중간에 한 번 사막 가운데 차를 세우곤 삼엄한 감시 속에 볼일을 보게 했다. 엄동설한에 사막에서 도망가라고 해도 못할 것 같은데…, 예전에 탈출자가 더러 있었던 모양이다.

"언니, 어떡해. 아까 돈을 다 삼키지 못해 급한 김에 음부에 두개 넣었는데 소변 보다 떨어졌어요. 군인들이 보고 있어서 줍지 못하고 그냥 왔어요. 어떻게 해요."

감시하는 군인이 조는 듯하자 예림이가 아까워 죽겠다는 듯이 귓속말을 했다. 눈을 깊이 감았다. 지금 이 순간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생각을 하면서 기도했다. 우리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며 우리를 지키시는'(시 121:4) 하나님임을 굳게 믿어야 했다.

 

(11) 내몽골서 두만강 인근 이송후 北 보위부에 인계돼

 


이번에는 투먼 감옥이었다. 내몽골에서 꼬박 사흘을 달려서야 북한과 인접한 투먼에 도착했다. 우리는 짐승 떼 몰리듯이 또다시 철창 속에 갇혔다.

"아이고, 아파서 혼났네."

몇몇 여인들이 팬티에서 무언가를 꺼내 주머니와 가슴띠 등에 숨겼다. 그 순간 갑자기 군견과 함께 두 명의 군인이 들이닥쳤다. 여인들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떼자 두 군인은 전기곤봉으로 사정없이 그들을 후려쳤다. 군견은 여인들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기어코 한 여인이 어딜 맞았는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여기 있습니다! 여기요!"

역시 돈이었다. 우리는 가지고 있던 돈을 먹었기 때문에 별로 걱정이 없었는데, 저들은 은밀한 곳에 넣어가지고 며칠째 오다 보니 염증도 생기고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데까지 감시 카메라가 달려 있을 줄 아무도 몰랐다. 여기서도 우리들은 짐승 이하였다. 가끔 바깥에서 장작 패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아우성은 그 자체만으로도 지옥이었다. 우리 방의 한 여인은 불려나간 지 세 시간 만에 거의 실신상태로 되돌아왔다.

"아니, 무엇 때문에 그런 곤경을 당했수?"

"모르겠소. 나도 모르는 사람을 대라고 해서 모른다고 했더니 막 때리고 기둥에 묶어놓는 게 아니오.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았을 걸…."

참으로 기구한 사연들이었다. 이들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정든 고향을 떠나서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걸까. 고국인 북한에서의 삶이 어찌했기에 남의 땅 중국에서 이처럼 모진 고생을 감수하는 걸까. 이전에 내가 몰랐던 북한의 처참한 실상에 치가 떨렸다. 그에 비하면 내가 살아온 과정은 너무 행복했다. 저절로 기도가 나왔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제가 살아온 길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축복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몰랐을 때에도 저를 보살펴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하나님, 이 불쌍한 백성들은 어찌 해야 합니까? 하나님 아버지, 이들을 거두어주십시오."

투먼의 밤은 하루도 평온하지 않았다. 하루는 옆의 남자 방에서 숨 넘어가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내일 북송을 앞두고 쇠못을 삼켰다는 것이다. 그러자 몇 명의 군인들이 몰려와 그 남자를 끌어냈다. 그를 병원에라도 데려가려나 했더니 그게 아니라 무자비한 폭행으로 응했다. "악∼!" "우와악∼!" 고통스럽게 질러대는 처절한 비명이 투먼의 밤하늘을 쩌렁쩌렁 울렸다. '이 중국 공산당 놈들… 언젠가 네놈들에게 천만 배로 복수하리라! 으으윽….' 모두들 주먹을 쥐고 이빨을 갈았다.

그러는 가운데 날이 샜다. 드디어 북송이다. 중국 군부대의 트럭이 몇 대 와선 100여명의 탈북자들을 짐짝 다루듯이 싣고 두만강 다리를 건넜다. 당시 중국의 북한 인접 부대는 탈북자들을 잡아 보내는 데 혈안이 돼 있었다. 탈북자 한 명에 통나무 3t씩을 맞바꾼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북한 온성의 보위부에 다시 짐짝 부려지듯 내려졌다. 극심한 공포감에다 2월의 맹추위까지 더해 모두들 부들부들 떨었다. 감방 하나에 10명씩 들어가게 하곤 옷을 벗겨 알몸으로 50번씩 앉았다 일어나기를 시켰다. 은밀한 곳에 감춘 돈을 빼내기 위해서였다. 다음은 뜀뛰기 5번. 항문에 넣은 돈을 빼내는 검사였다. 눈뜨고 보기에 너무나 흉측한 광경이었다.

조사가 시작됐다. 함께 간 동생들에게 눈치를 하며 위로해주었다. 그러면서 기도하라고 눈짓했다. 모두가 숨죽이고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조사를 받기 위해 나가는 이들의 모습은 영판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짐승들이었다. 아…. 하나님….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시 121:6∼7)

 

(12) 김정일 생일맞아 탈북자 사면 갈 수 없는 고향… 또 중국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지 않는 분이었다. 2월 초 북한으로 끌려간 우리는 사형당하거나 정치범 수용소에 갈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2월16일 김정일 생일을 맞아 탈북자들에게도 관대한 조치가 내려졌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고향으로 돌려보내라는 노동당의 지령이 내려진 것이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는 고향을 생각하니 그리움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그러나 갈 수 없는 길이었다. 나는 이미 북한 공민으로서의 모든 것을 잃은 상태였다. 다시 두만강을 통해 탈북하기로 동생들과 합의했다.

“부장동지, 우린 꼭 지금 가야 합네다.”

“아니, 제 정신이오? 며칠 전에도 한 청년이 살얼음 위를 건너다 빠져 죽었소. 5월까지 기다렸다가 수온이 좀 오르고 수량도 좀 줄었을 때 건너시오.”

“안 됩니다. 지금 가지 않으면 중국에서 운영하던 식당이랑 돈이랑 다 없어집네다. 결행하겠습네다.”

매수한 국경보위대 간부에게 죽어도 좋다는 다짐을 하고 나와 동생들은 두만강 얼음판 위에 올라섰다. 우린 손에 손을 잡고 눈물로 기도했다. 우리를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는 하나님께 생사를 맡겼다. 그리고 누구든 얼음 속에 빠지더라도 소리를 지르지 않기로 약속했다.

얼음판을 건너는 내내 속으로 ‘하나님 아버지’만을 읊조렸다. 칠흑 같은 밤에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하늘만 바라보면서 정신없이 걸었다.

“언니, 다 왔어요!”

중국쪽 두만강 기슭이었다. 그 넓은 강폭을 이렇게 빨리 올 수 있었는지 꿈만 같았다. 우린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잠시 호흡을 고르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의 발에는 물기 하나 없었다. 얼음이 녹아 위험하다던 두만강이 아니었던가.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낚아채 들어올려 얼음판을 건너게 해주신 것이었다.

“할렐루야! 하나님 만세!”

우리는 두 손을 쳐들고 하늘을 향해 눈물의 기도를 드렸다. 이제는 이 국경 지역을 벗어나야 한다. 순찰하는 군인들에게 잡히는 날엔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다. 차 불빛만 보이면 땅에 납작 엎드리면서 마을로 진입했다. 새벽이 밝아지면서 여기저기 사람들이 다녔다. 우리는 그들 속에 묻혀 태연하게 움직였다.

“얘들아, 저기 십자가 보이지? 이 새벽에 우리가 갈 곳을 못 찾을까봐 하나님께서 저 집에서 기다리고 계시는 거야!”

눈물범벅이 되어 뛰었다. 새벽기도가 처음 시작된 한 교회였다. 이처럼 세밀하게 준비하시고 우리를 맞아주신 하나님의 초대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대상 앞 땅바닥에 꿇어앉아 실컷 울었다. 그리고 이제부터 우리 모두의 운명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충성된 삶을 살아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한참을 기도하다가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모두 잠이 들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자 보는 단잠이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닭울음소리에 잠을 깼다. 교회 사찰 아저씨가 차려주는 식사를 염치도 없이 걸신들린 양 먹어치웠다. 아저씨로부터 옌지 시내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세세하게 지도받았다. 문제는 세 개의 경비초소였다. 버스를 타면 초소마다 서서 일일이 검사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택시를 타는 게 유리했다.

“예림아, 아직 몸에서 나오지 않은 돈이 얼마나 있지?”

“아직도 여러 개나 안 나왔어요.”

“그래, 기도하자.”

지금까지는 돈이 나오지 않게 해달라고 계속 기도했지만, 이젠 돈이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택시비를 마련하기 위해선 당장 돈이 필요했다. 하나님의 능력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다는 믿음으로 기도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

 

(13) 베트남 통해 한국 가려 난징행 브로커에 속고 구금됐다 훈방

 


"하나님은 언니를 참 예뻐하시나 봐요. 언니 기도를 그렇게 잘 들어주시니까요."

나도 놀랐다. 예림이 뱃속에 있는 돈이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했더니 신기하게도 그렇게 됐다. 두만강을 건너기 전부터 한번도 대변을 보지 못한 예림이가 내 기도를 기다렸다는 듯이 변의를 느끼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표현하기 좀 그렇지만 변속에서 나온 돈 뭉치 세 개를 물로 씻고 소금물에 담갔다 다시 씻어도 역겨운 냄새가 사라지지 않았다. 중국인 택시 기사는 코를 킁킁거리면서도 후한 요금에 마냥 싱글벙글이었다.

모든 걸 하나님께 맡겼다. 옌지까지 가는 도중에 있는 초소 3개를 무사히 통과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역시 검문이 예사롭지 않았다. 버스, 택시, 자가용 할 것 없이 다 세워놓고 검문했다. 우리가 탄 택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후줄근한 군인 한 명이 안을 힐끔 보고는 바로 보내는 것이 아닌가. 첫 초소야 우연으로 치지만 나머지 두 개 초소에서도 그런 식이었다. 하나님이었다.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황을 알고 지켜주신 것이었다.

이젠 옌볜에서 더 이상 머무를 수도 없었다. 우리는 한국행을 본격 결행하기로 했다. 여러 곳을 수소문한 끝에 베트남을 통해 가는 루트를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 월드컵축구대회가 한창 벌어지고 있던 2002년 베이징의 브로커와 연결해 베이징을 거쳐 베트남과 가까운 난징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우리를 향한 시련은 멈추지 않았다. 긴가민가 의심스럽던 브로커가 돈만 받아 챙기곤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결국 베트남 땅을 밟아보지도 못한 채 독안의 생쥐 꼴이 되고 말았다. 중국 세관에서 우리의 가짜 증명서가 발각됐다. 역시 기다리는 곳은 감옥이었다.

이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다시 북송되면 영영 끝장이었다. 감옥 안에서 목놓아 울면서 기도를 드렸다. 옆에서 "재수 없는 예수쟁이들"이라며 눈을 있는 대로 흘겼지만 우리는 "하나님, 정녕 저희를 버리십니까"라고 외치며 기도했다.

"저기 두 사람 나와!"

감옥에서 사흘만에 처음으로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나자 감옥 문이 열리고는 나와 예림이를 나오라고 했다. 처음엔 다른 사람인 줄 알았는데, 군인이 가리킨 두 사람은 분명 나와 예림이었다. 우리가 나가자 앞으로는 증명서를 제대로 갖고 다니라며 고향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우린 울면서 깡충깡충 뛰었다. 도저히 믿기 어려운 기적이었다. 사흘간에 걸친 눈물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신 것이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행16:25∼26)

베이징행 표를 끊어 서둘러 열차에 올랐다. 가방 깊숙이 넣어둔 휴대전화를 꺼내 켜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벨이 울렸다. 귀신에 홀린 듯 전화를 받았다.

"와이(여보세요)"

"주 선생이세요?"

"예? 아, 예."

"지금 어딥네까?"

"열차 안인데요. 그런데 누구신가요?"

옌볜의 누구를 통해서 나를 소개받았다고 했다. 너무 긴장해서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아는 사람 이름이 나오고서야 가까스로 진정됐다. 베이징 역에 내려 밖으로 나와 오른쪽을 보면 검은색 승용차가 있으니 타라고 하곤 전화가 끊겼다. 직감적으로 위험이 감지됐다. 예림이에게 베이징에 내려서부터는 일단 따로 행동하자고 했다. 열차는 거의 하루를 달려 베이징에 도착했다.

"이리로 오세요."

역사를 막 벗어나려는 순간 검은색 안경을 낀 남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아세요?"하고 물으려는데, "이미 주 선생 사진을 보아서 압니다"며 답변부터 했다. 또 다시 체포됐다 생각하고 체념했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었다.

 

(14) 잡혀 가는줄 알았던 승용차 도착 하니 한국영사관 정문

 

달리는 승용차 안에서 꼼짝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기도가 나왔다. 기도를 했는 데도 엄습하는 공포와 불안을 도저히 떨쳐낼 수가 없었다. 죽음의 소굴에서 겨우 빠져나오자 더 무서운 죽음의 소굴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그때, 갑자기 귀가 멍해지더니 무슨 소리가 들렸다.

“사랑하는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마라. 놀라지 마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네가 너무 고생하기에 내가 너를 직접 데리고 한국으로 가려 한다.”

두 눈을 번쩍 뜨고 앞자리 운전자와 옆자리 검은 안경 쓴 남자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 다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면 방금 내 귀에 들린 그 소리는 무엇이란 말인가. 정녕 하나님이 들려주신 음성이란 말인가. 다시 한번 듣고 싶어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나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내가 탄 차는 베이징 시내를 경쾌하게 내달렸다. 다시 눈을 감았다. 잠이 들었다.

내가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 밖으로 나갔다. 수많은 기자들이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고 환영객들이 꽃다발을 건네줬다. 나는 기쁨과 감격의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하나님 만세! 만세! 만세!”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너무 소리를 질러 더 이상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주 선생님, 다 왔습니다. 내리시죠.”

꿈이었다. 잠깐 졸면서 꿈을 꾸었다. 내가 한국에 도착해서 수많은 사람의 환영을 받는 꿈이었다.

“자, 주 선생님. 여기는 대한민국 영토입니다.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여기는 중국 주재 한국 영사관입니다.”

2002년 11월4일. 참으로 크나큰 하나님의 은혜였다. 북한 보위부 사람들에게 붙들려 끌려가는 줄 알았는데 한국 영사관으로 왔다니, 믿기지 않았다. 베이징 역에서 동생들과 함께 타지 않은 게 후회됐다. 그러면 나를 태워준 그 사람들은 누구란 말인가. 그 이후로 그 사람들을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하나님께서 나를 구하려고 보내주신 천사들이라고 생각한다.

“야! 김정숙이다!”

영사관 안 어디론가 갔는데 한 여자가 나를 알아보았다. 성형수술을 하고 세월이 흘러 많이 변해버린 얼굴인 데도 신기하게도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30여분간 조사를 받고 한 방으로 들어갔다. 80여명의 남녀가 방에 꽉 차 있었다. 한국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탈북민들이었다. 모두들 평온한 얼굴로 끼리끼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나도 평범한 탈북여성으로 처신하며 그들 속에 들었다.

이들은 순서대로 한국으로 갈 예정이며, 나의 경우 석 달 정도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는 것도 알았다.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넓고 넓은 만주 벌판에서 떠돌던 우리들에게 구원의 빛을 주시어 이렇게 축복의 땅으로 인도해주심에 감사 드립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기구한 사연들을 털어놨다. 사연들마다 아픔과 슬픔이 범벅이 돼 있었다.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그 시간에도 굶주림에 쓰러져가는 북한의 동포를 떠올리며 자신들의 축복에 감사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우상의 땅 애굽에서 이끌어내시어 광야에서 40년 동안 훈련시키시고 축복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그 하나님께서 오늘의 북한 땅, 그 우상의 땅에서도 동일하게 역사해주시기를 기도했다.

나 개인적으로는 만주 광야와 몽골, 베트남 국경 등을 전전하며 숱한 연단을 겪게 한 뒤 축복의 땅 대한민국으로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와 계획이 신기하기만 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 깊이 새기면서 그분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증거하는 복음의 증인이 되리라고 굳게 다짐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15) 꿈에 그리던 한국에 첫 발 탈북의 여정,주마등 처럼

 


2003년 1월 27일. 드디어 대한민국으로 들어왔다. 새벽 6시쯤 인천공항에 도착한 나는 어리둥절했다. 무엇보다도 중국의 한국 영사관으로 실려가던 승용차 안에서 깜박 졸면서 꾼 꿈이 그대로 현실화됐다는 게 신기했다. 꽃다발을 안기며 반가이 맞아주는 사람들, 그리고 연신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려대는 기자들….

우리는 대형 버스에 실려 어디론가로 갔다. 그간 중국에서 겪었던 3년여 동안의 처절했던 과정이 차창 밖으로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함께 오지 못한 동생들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북한에 두고 온 가족들을 이젠 영영 볼 수 없다 싶으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무엇보다 그들이 나 때문에 배신자로 취급받을 일이 못 견디게 괴로웠다.

아직도 어둠이 걷히지 않은 한국의 차창 밖 풍경이 너무나 황홀했다. 그 중에서 약속이나 한 듯이 빨갛게 불을 밝히고 있는 수많은 십자가들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십자가가 얼마나 많나 하나 둘 세어보았다. 그러나 이내 무리라는 걸 알았다. 그야말로 온통 십자가 천지였다.

‘아, 이 나라는 십자가의 땅, 십자가로 세워진 나라구나. 그래서 이 나라에 큰 축복이 내려졌구나.’ 독재자 우상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나라와 십자가가 세워진 나라는 지옥과 천국의 차이였음을 깨달았다.

한국에서는 일정기간 당국의 조사를 받고 2개월 동안 하나원에서 정착교육을 받게 돼 있었다. 한 달 여 간의 조사를 마친 뒤 우리는 영락교회에서 드리는 합동예배에 참석했다. 중국에 있을 때부터 ‘한국의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 하며 몹시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아마 대단할 거야’ 하는 기대도 했다. 역시 기대 이상이었다.

교회 입구에 들어설 때부터 어떤 곳에서도 느낄 수 없는 성스러운 기운에 압도당하는 듯했다. 성전 안으로 들어서니 그와는 딴판으로 웅장하고 위엄이 있는 가운데 포근하게 감싸주는 느낌이었다. 6·25전쟁 때 내려온 실향민 1세들이 지은 교회라는 데에도 각별한 의미를 느꼈다.

“여기 혹시 평양에서 온 사람 없소?”

목사님의 설교가 끝나자 웬 남자 한 사람이 우리 앞으로 다가오더니 불쑥 물었다.

“이 동무가 평양에서 왔습네다.”

옆의 예진 언니가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그 남자는 바로 “혹시 모래터에서 오지 않았소?”라고 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모래터’라면 호위사령부 청사를 지칭하는데, 그걸 아는 사람이라면 그곳과 관련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았다.

“혹시 호위국 출신이세요?”

“난 호위국 장교였습니다.”

기뻐서 손을 내밀고 악수를 했다. 대한민국 땅에 와서 이렇게 호위국 출신을 만날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하고 반가웠다. 내가 호위사령부 협주단 배우였다는 걸 밝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대부대 남숙 동지 배우지요?”

더욱 놀랐다. 탈북 이후 누구에게 말하지 않았던 나의 지난 추억 속의 그 시절을 상기시키는 그 사람이 반갑기 그지 없었다. 그 사람은 한국에 온지 5년이 지났으며 신학을 공부해 목사 안수를 앞두고 있다고 했다. 또 다시 놀랐다. 탈북자도 공부하면 목사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리곤 나는 이 땅에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업가? 아니면 연예인? 연예인이 되기에는 나이가 너무 들었다. 아무래도 사업을 하는 게 가장 어울릴 것 같았다. 나름대로 성공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지금껏 이끌어주셨는데 앞으로도 이끌어주시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이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롬 4:20∼21)

 

(16) 하나원서 2개월여 적응 교육 中서 함께 살던 동생들도 만나

 


한국에서도 나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하나님의 기적은 멈추지 않았다. 한국에서 첫번째 기적이 일어났다. 정보기관에서 한창 조사받던 어느 날,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중국 베이징에서 헤어졌던 예림이가 비슷한 시간에 나와 같이 조사를 받고 있는 게 아닌가.

우리 둘에게 이보다 더한 충격은 없었다. 예림이를 만나는 순간, 반가움과 기쁨으로 잠시 심장이 멎는 듯했다. 우리 둘은 서로를 끌어안고 한동안 엉엉 울었다. 그리곤 뜨겁게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한순간도 잊어본 적 없는 사랑하는 동생 예림이를 만나게 됐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읽고 그렇게 스토리를 엮어주신 것이었다.

내가 베이징역에서 예림이와 헤어진 뒤 한국 영사관을 거쳤던 데 비해, 예림이는 그런 과정을 생략하고 바로 한국으로 들어왔다. 결국 내가 한국에 도착한 며칠 후 예림이도 한국땅을 밟았던 것이다. 우리 사이의 혈육보다 더 진한 정과 사랑을 하나님이 곱게 보아주신 듯하다.

하나원 생활이 시작됐다. 중국에서 함께 지냈던 동생 예정이, 예림이와 함께 하나원에서 지낸다는 게 꿈만 같았다. 하나원 선생님들은 참으로 우리를 따뜻하게 대해주셨다. 대한민국에 도착한 우리를 반겨주는 그들이 눈물겹게 고마웠다. 북한땅을 떠날 때 상상도 하지 못했던 현실이 참으로 신기했다. 사흘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마고 어린 딸과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영원히 떨어져 살아야 하는 엄마의 아픔이 가슴 한구석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뿐인가. 중국땅 여기저기 팔려다니던 동족들, 무참히 짓밟히고 전기 곤봉에 맞아 쓰러지던 동료들, 중국과 북한의 감옥에서 몸부림치던 영혼들의 신음소리가 귓가에 쟁쟁했다.

내가 지금 누리고 받는 축복은 어디에서 왔을까를 생각했다. 정녕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토록 우리를 축복해주실 줄 상상이나 했던가. 가족과 생이별의 아픔을 느꼈을 때 죽고만 싶었던 내가 축복의 땅 한국에 와서 누리는 행복은 정녕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가능했다.

하나원 37기. 어쩌다 보니 총무와 회장을 맡아서 하게 됐다. 탈북한 뒤 모진 고생을 겪어온 여인들과 조직생활을 하면서 2개월 이상 평온하게 지낸다는 게 쉽지 않았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진 사람들인지라 사소한 일에도 예민해지고, 그러다 보면 여러 가지 마찰이 심했다. 역대 총무와 회장들이 예외 없이 몇 차례씩 울었다는 말이 실감났다.

나름대로 그들의 마음속 상처를 어루만질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이른 아침이면 나는 조용히 방송실로 내려갔다. 그리곤 기상 시간이 되면 상쾌한 기상 구령과 함께 북한 음악을 틀어주었다.

"마치 고향에 온 것 같아요."

"회장 언니, 너무 감사해요."

우리는 한동안 북한 노래조차 들어볼 수 없었다. 어떤 이는 내 손을 부여잡고 엉엉 울기까지 했다. 그랬다.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너나 할 것 없이 마음속에 모진 상처들을 갖고 있었다. 주일 아침이면 찬양으로 기상을 시켰다. 그러자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며 하루를 시작하는 기분이라며 모두 기뻐했다.

하나원에서는 우리끼리 각자 재능대로 가끔 공연을 했다. 한번은 분과장 선생님의 생신이란 걸 알고 깜짝 축하공연을 준비했다. 예정이가 아코디언을 메고, 내가 석 줄짜리 바이올린으로 정성껏 공연했다. 선생님은 세상에 태어나 그렇게 멋지고 감동적인 공연은 처음 본다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셨다.

전화카드로 가끔 중국 지인들에게 전화하고 북한 가족의 소식도 전해들을 수 있었다. 모두 행복해했다. 막연한 가운데서도 저마다 작은 소망을 품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하나원 시절이 한국에 와서 가장 편하고 재미있었던 것 같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17회부터 끝까지는

   다음 글50번에 계속. 관련 동영상도 있음. ▶바로 가기

출처 : 온누리 선교회
글쓴이 : ls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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