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주년 3.1 절 기념식이 부산 동래 고등학교서 거행 했습니다.
우리 독도연합총본부에서도 이 행사에 참석하여 그날 그 느낌을 받고 했습니다.
오늘...
집에서 비오는 3.1절을 맞고보니...
<3.1독립만세운동>의 배경이나 되새겨 봅니다.
<3.1독립만세운동>은 우리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니
우선 우리가 그간 잊고 있던 <3.1독립만세운동>의 배경이나 살펴보지요.
기미년 만세운동은 사실 어느날 갑자기 터진 1회성 '사건'은 아니었지요.
사악한 일본제국주의자들과 정신나간 을사오적 무리들의 농간으로
우리가 나라를 빼앗긴 지 십여년 쯤 지났을 무렵에
당시 국제적으로 민족자결주의 사상이 대두하자
이를 민족해방의 기회로 살리고자 하는 노력은 국외에서 먼저 나타났습니다.
그 전해인 1918년 11월 여운형·김규식·장덕수 등이 신한청년당을 결성하고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중국에 온 미국 특사에게 전하는 한편,
드디어 1919년 1월 김규식을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하고
국내외 민족운동가들과 독립운동 방법을 협의했습니다.
1918년 12월 미국지역의 대한인국민회 총회는 이승만 등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하기로 결의했으나,
미국 당국이 출국을 허가하지 않자 미국 대통령에게 3개항의 청원서를 제출했지요.
도쿄[東京]에서는 1919년 2월 조선인유학생학우회가 중심이 되어 조선독립청원단을 결성하고
민족대회소집 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는데
이것이 바로 <2.8독립선언>이었지요.
드디어 기미년(1919년) 3월 1일 오후 ...
이러한 해외의 움직임을 알게 된 손병희·최린 등 천도교측 인사들과
이승훈 등 평안도의 기독교계 인사들이 국내에서의 독립선언을 계획했지요.
여기에 불교계의 한용운 등이 참여하여,
천도교·기독교·불교 3개 교단이 국내 독립선언의 주축이 되었습니다.
이들이 준비한 운동계획은 결과적인 3.1운동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애초에 독립선언과 일본에 대한 독립청원을 병행하고,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의 3원칙에 따라 운동을 진행하려는 것이었지요.
이에 따라 독립선언서, 파리 강화회의 등에 보내는 독립청원서, 일본정부에 보내는 독립의견서 등이 작성되었고,
2월 27일 독립선언서가 인쇄되어 종교교단을 중심으로 미리 배포되었습니다.
그후 고종의 장례일인 3월 1일 정오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 등지에서
전국적 동시다발로 독립선언식이 이루어짐으로써,
전국적인 민족해방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운동을 계획·준비한 종교계의 '민족대표 33인'은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의 취지를 밝힌 다음 바로 일제 경찰에 자수했지요.
원래 33인은 독립선언식을 종로의 탑골공원에서 거행하기로 학생들과 합의했었답니다.
아마 이 싯점에는...
우리 카페의 고문이신 삼산형님(원정님)의 선친이신
당시 중앙고보 학생대표이던 이선호 선생께서 주도하신
학생운동층과 약간 생각이 다른 면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33인은 공원에 모인 학생·시민 들이 전면적인 시위에 들어가
그들이 세운 비폭력 원칙을 깨뜨릴 경우,
일본·미국 등 열강의 호의를 얻어내지 못할까 우려하여 장소를 바꾸었던 것입니다.
결국 탑골공원에서는 이선호 대표를 비롯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군중은 독립만세의 함성을 외치며 시위대열을 이루었지요.
결국 이 날의 독립선언식은
대중의 반일감정이 자연발생적으로 폭발하는 만세시위운동으로 확산되었습니다.
특히 우리 선자 호자 족숙께서 주도하신
특히 우리 선자 호자 족숙께서 주도하신
광화문 기념비각 앞에서의 만세시위가 이러한 상황을 주도하였지요!
(지금 그 자리에 가 보시면 "이선호(의사)가 만세운동을 시작한 표지석"이 있습니다)
학생들은 3월 1일 시위운동의 후속조치로
3월 5일 서울역 광장에서 다시 모여 시위를 했습니다.
이후 3월 상순 무렵부터는 주로 대도시에서 전개되던 만세시위가
전국 각 지방의 중소도시와 농촌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운동은 5월까지 지속되었고, 특히 3월 하순에서 4월 상순 사이에는
동시다발적이고 격렬한 투쟁양상을 보여 운동이 최고조에 이르렀지요.
결과적으로 운동이 급속히 확산되는 데는 지식인·청년·학생층의 역할이 컸습니다.
이들은 서울 등 도시지역에서 유포된 선언서, 각종 유인물과
시위 경험을 각 지역에 전파하는 데 앞장섰을 뿐 아니라
각종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시위를 준비하고 이끌었습니다.
경기도 부천의 혈성단, 대구의 혜성단, 조치원청년단 등이 그 예입니다.
그 결과 이들과 함께 광범한 민중이 비타협적인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서울에서는 3월 22일 노동자대회가 열렸으며
서울에서는 3월 22일 노동자대회가 열렸으며
전차종업원, 경성 철도노동자 등은 파업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항의했고
서울·평양·선천 등지에서는 상인들이 철시(撤市) 투쟁을 벌였지요.
농촌에서는 횃불시위와 산 위에서의 봉화시위가 벌어졌고,
이 마을 저 마을로 시위를 확산하는 만세꾼이 등장했습니다.
3월 1일 이후 전국을 휩 쓸었던 시위운동 상황(결과)을 살펴보면
집회 횟수 1,542회, 참가인원 202만 3,089명, 사망자수 7,509명, 부상자수 1만 5,961명,
피검자수 5만 2,770명, 불탄 건물은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나 되었답니다(일본측 발표).
국내에서의 시위운동에 호응하여
간도·연해주·미국 등지에서도 이에 동조하는 시위가 일어났지요.
북간도에서는 3월 13일 용정(龍井)에서의 독립선언식이 최초였으며,
서간도에서는 3월 12일 류허 현[柳河縣] 싼위안푸[三源堡]에서의 독립선언 경축대회로부터 시위운동이 시작되었고
연해주에서는 3월 17일 대한국민의회 주최로 독립선언과 시위가 시작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샌프란시스코와 하와이 등지에서 주로 모금활동을 통해
임시정부의 재정이나 파리 강화회의에서의 선전활동을 지원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는 여러분이 기억하시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지요.
일본제국주의자들은 겉으로는 문화통치로 식민통치 방법을 순화시켰고
어리석은 일부 백성들은 일제에 순응하여 생활인으로 살아가기도 하였지요.
그러나 몇 몇 우국지사들은 저항을 계속하거나 심지어 자결하기도 하였고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기도 하였지요.
그 결과
1945년에는 드디어 미국 주도의 연합국 승리로 우리나라의 독립을 쟁취하였고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 국민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독립운동을 가열차게 전개하신 선열님들 덕분에...
그러니...
오늘 우리는 집에서 편히 쉬더라도
최소한 당시 우리의 독립만세운동의 상징인
우리의 국기, 태극기라도 게양하고 쉽시다!
출처 : 엠프라이즈
글쓴이 : 월카맨(사랑에향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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